山崎

패럴랙스 42일

※ [] : 영어 및 기타 외국어
※ 굵은 글씨: 번역기 음성* * *

변의주는 올 초 군 휴학을 마치고 서울의 모 종합대학의 화학생명공학과 2학년으로 복학했다. 서울 원룸에 빼곡히 들어 사는 대학생 무리 가운데서 딱히 모나거나 특출난 부분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2학년을 마쳤으니 별다른 스펙도 없고, 최근 그나마 열중한 일은 가을에 있었던 동아리 축제 준비. 공과대학 유일 밴드부에서 베이스를 잡았다. 이제 고학년을 앞둔 기점에서 가장 큰 고민은 진로, 적성, 특기, 앞으로의 미래. 그런 것들을 콩나물시루에 처박힌 가장 기다란 콩나물로서 과학도서관에서 고뇌하는 게 요즘의 일과.의주는 신입생 때 신형 기숙사에서 학교를 다녔으나, 2학년이 되어서도 기숙사에 붙을 만큼 성적이 월등하지는 않았기에 2학년 첫 학기에는 경기도에 있는 본가에서 통학했다. 그리고 학기 내내 후회와 탄식으로 얼룩진 시간을 견딘 끝에 복학 이후에는 꼭 자취하리라 결심했다. 의주에게 먼저 자취 제안을 한 쪽은 군 동기인 B였다. 의주보다 같은 학교이면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다소 늦게 입대한 그는 의주보다 세 살 위였는데, 나이와 무관한 허물없는 태도와 풍부한 인생 경험이 있었다. 의주는 18개월간 부대끼며 그런 B를 어느 정도 동경하고 있었기에 B의 하우스 메이트 제안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는 상위 5퍼센트 내에 들고도 남을 듯한 훌륭한 동거인이었으나, 방랑벽이 있다는 것이 약간의 흠이었다.내년까지 계약 연장을 해놓고서는 겨울방학에 돌연 독일로 6주간 여행을 간다며 통보해 온 것이 2주 전이었다. 의주는 제때 졸업하기 위해서 계절학기를 꼬박꼬박 들어야 하는 형편이었기에 집을 비우고 세를 줄 수는 없었다. 급작스러운 통보에 의주가 한창 혼란스러울 와중, B는 새로운 동거인을 꽂아 넣었다.
미국에서 니콜라스 왕으로 통하는 그의 본명은 왕이샹이라고 했다. 의주는 그의 얼굴을 어떤 홈페이지의 아티스트 소개란에서 확인했다. DSLR 카메라를 왼쪽 눈에 가져다 대고, 눈과 입이 가늘게 벌어져 있는 남자. 이름과 얼굴을 모두 외우는 데까지 2분도 걸리지 않았다.

* * *

니콜라스는 날짜를 꾸역꾸역 크리스마스 이브로 골라 입국했다. 대만에서 한국으로 날아오는 A 항공 233편. 원래는 미국에서 학교에 다니는데, 작년 말부터 휴학하여 지난 한 해 동안 고향인 대만에서 지냈다고 한다. 니콜라스의 대학은 15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C 예술대학. 미국에서는 상당히 알아주는 예술대학 중 한 곳이라고 하긴 하는데, 수험생 때도 국내 대학 순위조차 잘 몰랐던 의주가 알 리는 만무했다. B에게는…예비 처남 정도라고 한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보낼 사람이 마땅치 않았던 의주는 이틀 후 출국이 예정된 B와 함께 니콜라스를 픽업하기로 했다. 4주 치 짐이 워낙 많기도 하겠고, 그 김에 눈도장이나 찍자 싶은 심정이었다. 그 프로필 사진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까탈스러워 보이는 인상이어서, 맞는 결정일지 확신이 제대로 서지는 않았다. B에게 듣기로는 착하고 순하댔지만, 아마 B가 그렇지 않다고 평가할 인물이면 인간 말종이나 다름없을 테니 딱히 신뢰성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B의 구형 쏘나타 라디오에서는 프로그램 사이사이 배치된 57분 날씨가 흘러나온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외출하는 분들 많이 계실 텐데요, 오늘 날씨는 최저 기온이 영하 9도까지 내려가면서 어제보다 한층 쌀쌀한….의주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며 공항 내부를 내려다보았다. 잔뜩 싸맨 여행객들과 두꺼운 캐리어, 바삐 돌아다니는 승무원들, 입구에 트리를 전시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내는 프랜차이즈 카페, 공항 특유의 쾌적하면서 서늘한 분위기와 휴가를 앞둔 사람들이 자아내는 미묘한 설렘. 우중충한 진회색 후드에 청바지, 무릎 바로 위까지 올라오는 검은 롱패딩을 입은 의주가 머리를 긁적였다.니콜라스의 비행편은 지연 없이 도착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게이트로 나오는 것이 보인다. 낯설거나 지나치게 익숙한 나라로 첫 발걸음을 뗀 사람들의 얼굴에 오른 불그레한 홍조와 저마다의 언어로 떠들어대는 활기찬 대화. 대학 입학 직전 고등학교 친구들과 2박 3일간 다녀왔던 일본 여행이 마지막이었던 의주가 미묘한 기분으로 사람들 틈바구니를 훑다가 한 남자에게로 불현듯 시선을 고정한다. 그는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승객이었는데, 의주는 그가 프로필 사진 속 니콜라스와 다소 차이가 있음에도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어떤…. 의주가 그의 입국길 사진을 찍으러 온 기자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었다.너덧 개쯤 되는 캐리어를 카트에 싣고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거리낄 것 없이 권태로운 낯의 남자. 이까짓 비행은 수백 번도 해본 듯이, 작은 제스처 하나에도 시건방지다고까지 느껴질 법한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폭이 좁은 선글라스, 두툼한 양모 재킷, 두꺼운 목을 빈틈없이 감싼 폴라 티셔츠, 촘촘한 목걸이가 차례로 의주의 시선에 들어온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반쯤 넘겨서 멋을 부렸다. 다리에 적당할 정도로 딱 올라붙은 가죽 바지에, 신고 벗으려면 십 년은 걸릴 듯한 워커까지, 패션의 피읖도 모르는 의주가 봐도 그것은 완전체였다. 얼굴은 또 어떤지. 길쭉한 체형에 비해 이목구비가 둥글둥글하니 귀여운 느낌인 의주와 달리, 온통 날렵한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듯한 얼굴이 인상적이다. 훅 떨어지는 눈 앞머리와 숱 많고 위로 쭉 뻗은 눈썹, 곧은 코와 그 밑의 도톰한 윗입술. 사진으로도 부리부리한 인상이라고 느꼈는데, 실제로 보니 위압감의 정도가 달랐다. 의주는 문득 저 사람과 살 부대끼며 살 수 있을지 걱정부터 든다.
B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낯으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니콜라스!”어…. 의주가 눈을 껌벅였다. 이렇게 보니 다르네.눈썹을 늘어뜨리고 눈에 힘을 풀어 안면 가득 짓는 미소에 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는 패션모델이 런웨이 걷듯이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걷던 걸음걸이가 종종걸음으로 변해 두 사람을 향해 뛰어온다. B가 오랜만에 가족 상봉하는 것처럼 반가워하며 니콜라스를 끌어안았다. 의주의 바로 앞에서 니콜라스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코끝에 샴푸 향이 스친다. 의외로 향수는 뿌리지 않는 것 같았다.“好久不⾒。”니콜라스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목소리가 꽤 낮고 말투가 빠른데, 그렇다고 답답한 느낌은 아니었다. 외려 중화권 배우 같기도 했다. 의주는 문득 B가 중어중문학과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중국어 두어 문장이라도 연습할 걸 그랬나 생각했다. 마침 니콜라스가 팔을 풀고 의주와 눈을 맞췄다. 니콜라스도 결코 작은 편은 아닌데, 의주의 키가 워낙 큰 탓에 의주의 시선이 미묘하게 아래로 비꼈다. 가까이서 보는 얼굴은 또 새롭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작은 눈동자에 선명한 이채가 돈다.“我給你介紹、這是我朋友。 변의주.” B가 말했다. “그리고 여기는 저번에 소개했듯이 왕이샹. 니콜라스라고 부르면 돼.”
“반가워요, 의주.”니콜라스가 오른손을 내밀며 서툰 투로 말했다. 중국어와 달리 느릿느릿, 어절 사이사이에 미묘한 틈이 있다. 고민하던 의주도 한국어로 대답한다.“저도 만나서 반가워요.”그러고 짧게 영어를 덧붙였다. 나이스 투 밋 유. 다소 귀여워진 발음에 니콜라스가 크게 웃더니 의주의 손을 꽉 쥐었다가 일순 힘을 풀며 여전히 낮은 톤으로 말했다.“유 큐트.”생각보다 까탈스러워 보이지는 않지만…. 의주의 얼굴에 난색이 돌았다. 이런 타입은 조금 어려운데. 입 안이 쩍쩍 말라붙어 의주는 괜히 침을 삼켰다. 이상한 긴장감이 든다.

* * *

짐을 전부 오피스텔에 옮긴 후, 세 사람은 근처 삼겹살집으로 직행했다. 이전에도 몇 번인가 한국에 체류한 적 있던 니콜라스가 삼겹살의 빅 팬이랬다. 아! 삼겹살 너무 좋아요. 니콜라스가 짐을 싣다 말고 인상을 잔뜩 쓴 채 한국어로 소리쳤다. 의주는 표정만 보고 처음에는 쫄 뻔했다.두 사람은 중국어라고는 니하오, 시에시에, 니취팔러마밖에 모르는 의주를 배려하여 영어로 대화하긴 했지만, 네이티브 수준의 빠르게 오가는 일상 영어도 낯설게 들리기는 매한가지였다. 매캐한 냄새가 가득한, 건조하고 후텁지근한 고깃집 4인 테이블에 세 사람이 앉았다. B와 니콜라스가 나란히 앉고, 의주가 B 앞에 앉았다.“맛있어요.”B가 얹어준 삼겹살을 게 눈 감추듯 먹어버린 니콜라스가 또 미간을 잔뜩 좁힌 채 흥분한 투로 말했다. B가 웃으며 타박을 줬다. 천천히 좀 먹어.의주가 니콜라스를 가만히 보다가 밑반찬이나 삼겹살을 좀 밀어줬다. 그러자 니콜라스가 고개를 들어 웃어주더니 금세 시선을 떨궜다. 건장한 초면의 20대더러 돌연 큐트하다고 말하는 불도저 정신은 둘 사이에 B를 끼우면 살아나고, 방금처럼 의주가 직접 부딪혀오면 사그라들었다.낯을 좀 가리나. 나이는 동갑인 데다 생일은 자신보다 두 달 빠르면서, 의주는 니콜라스가 어딘가 연하처럼 보였다. 환경이 낯설어 그런가.B가 자리를 비웠다. 첫 문장을 한참 생각하던 의주가 어렵게 운을 뗐다. 영어로 말해야 해서 더 어렵다. 눈치를 보느라 (1) 테이블과 (2) 반대편 시계와 (3) 의주의 후드 티셔츠에 쓰인 프린팅을 차례로 지나가던 니콜라스의 눈동자가 의주의 말에 붙들렸다.[포토그래퍼라고 들었어.]
[아직…포토그래퍼라기에는 좀 그렇고.아직 배우고 있는 단계야.]니콜라스가 민망한지 빠르게 얼버무렸다. 덕분에 의주는 뉘앙스로 뜻을 겨우 헤아렸다. 초조함에 테이블 밑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던 의주가 겨우 문장을 생각해냈다.[그렇지만 B가 칭찬을 정말 많이 하던데. 작년에는 전시도 했다고.]
그러자 니콜라스가 벌건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렇지 않아. 그냥 학교에서 작게 하는 거고….]
[나도 몇 개 봤어. B가 보여줘서.]
[…어땠어?]음. 의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우 워즈 잇? 세 단어는 못 알아들으려 해도 못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의주는 B가 팔불출처럼 자랑했던 홈페이지에 몇 개 걸려 있던 니콜라스의 사진을 떠올렸다. 솔직히 뭘 찍었는지 잘 모르겠던데. 심지어 제목도 제대로 안 붙어 있어 더 감이 안 왔다. 현대예술은 다 그렇겠지만. 작은 화면으로 봐서 더 그런가. 의주는 난감해졌다. 칭찬해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는 더 모르겠다.[나한테는 조금…어렵던데.] 솔직하게 토로한 의주가 다급히 수습했다. [다음에는 직접 보고 싶어. 휴대폰으로 봐서….]니콜라스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의주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처음 봤을 때처럼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저렇게 웃어도 경박하게 들리지 않는 건 목소리 덕분인가.[의주 정말 솔직하다. 나도 그래. 나도 내가 뭘 하는지 모르겠어.]니콜라스의 시원한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B가 돌아왔고, 둘의 스몰 톡은 그걸로 끝났다. 성공적인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B는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 싶었는지, 삼겹살을 먹었으면 코리안 트래디셔널 알콜도 맛봐야지, 하며 기어이 소맥을 말고 나섰다. 의주는 딱히 술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고 술을 권유받으면 보통 두 번 중 한 번꼴로 거절하는 편이었으나,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오늘은 오랜만의 고깃집이기도 하고, 처음 보는 사람도 있고, 히터 돌아가고 숯불 이글거리느라 후텁지근한 내부가 시장통처럼 시끄러워 머리도 무거워졌고, 연말 기분도 나고 하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의주야 뭐 소맥 몇 잔 가지고는 얼굴색도 변하지 않으니까. 웃으면서 술잔을 받았다.다만 니콜라스가 한 잔 먹고 뻗을 줄은 몰랐다. 알코올이 들어간 순간부터 흰 편이던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라 술톤이 되는 걸 보니, 술이 몸에 안 받는 체질인 듯했다. 그러더니 뭘 더 먹이지도 않았는데 혼자 주절거리다가 머리를 박았다. B도 약간 당황한 모양이었다.“원래 이 정도로 못 마시진 않는데. 오늘 비행도 있고 해서 피곤했나 봐.”의주는 황당한 낯을 숨기지 못한 채 정수리를 시원하게 테이블에 박은 니콜라스를 내려다보았다. 정교하게 세팅되어 있던 머리카락은 숨이 다 죽었고 살짝 튀어나온 윗입술에는 기름기가 번들번들하게 빛난다. 의주는 무심코 니콜라스의 뺨에 손을 한 번 대본다. 취한 사람 특유의 뜨끈한 기운이 전해진다. 니콜라스는 갑작스레 차가운 손가락이 닿아서 그런지 눈썹을 꿈틀거리며 뭐라 꿍얼거렸다. 얼굴 처음 맞댄 지 겨우 4시간쯤 됐는데, 참 다양한 모습을 본다.B가 계산하는 사이 의주가 니콜라스의 어깨를 건드렸다.“니콜라스.”
감긴 눈이 움찔댄다.
“니콜라스. 렛츠 고 홈.”의주가 어색하게 영어를 입에 담자, 니콜라스가 눈을 느리게 깜박이더니 고분고분 상체를 일으켰다. 아. 의주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카락에 쌈장 묻었어. 의주가 물티슈로 머리카락을 닦아주는 동안, 니콜라스는 얌전히 앉아 눈을 꿈벅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실실 웃는다. 맨눈의 초점 나간 니콜라스는 어쩐지 맹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다. 선글라스와 양모 재킷, 사람을 걷어차서 골절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워커 내부의 니콜라스 왕은 이런 사람인가 싶다. 니콜라스? 착하고 순해. 의주는 그 시점에서 B의 평가를 되짚어보았다.

* * *

날짜상 만 하루를 세 장정이 투룸에 묵어야 했다. B와 의주 모두 성격상 집에 누굴 함부로 들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같이 산 지는 5개월째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어차피 니콜라스에게 방을 내줘야 하는 B가 거실에서 자고, 니콜라스는 당장 오늘부터 B의 방을 쓴다. 의주는 삼겹살 먹으러 가기 전에 미리 침대 커버를 씌워둬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침대에 내동댕이쳐진 니콜라스가 냉기 가득한 이불 속을 파고들며 입을 쩝쩝 다신다.“잠옷이 있나?”여전히 검은 폴라 티셔츠를 입은 니콜라스를 내려다보던 B가 말했다. 방구석에 니콜라스가 가져온 대형 캐리어가 쌓여 있긴 했지만, 굳이 저걸 열어서 잠옷 찾는 행위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어차피 형은 짐 다 싸셨으니까 오늘은 그냥 제 옷 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고맙지.”의주는 니콜라스를 짐짝처럼 옮길 때 잡았던 몸의 두께감을 가늠하며 서랍에서 니콜라스가 입을 만한 옷을 골라냈다. 체격으로만 따지면 상당히 마른 축에 속하긴 했는데, 골격이 좋아서 어깨나 등판이 넓었다. 배는 납작하고 허리는 이쯤…. 한참 생각하던 의주는 본인의 사고에 말려들어서, 자신도 약간 취했나 싶어졌다.“니콜라스.”의주가 니콜라스를 흔들어 깨우자, 니콜라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술 꼴은 사람 중에 말을 제일 잘 알아먹는 것 같다. 의주와 눈이 마주치자 흐흐, 하고 헤실댄다. 술버릇이 웃는 건가.“파자마. 체인지.”
“아….”니콜라스가 단전에서 나오는 것 같은 희한한 소리를 내더니 한참을 꾸물댄다. 의주가 옆에 앉아 어깨를 두드리며 어르고 달랜다. 착하지, 니콜라스. 제발 일어나볼래. 알아들을 리 만무하겠지만. 한참을 못 들은 척하던 니콜라스가 갑자기 누운 상태로 밑단을 쥐고 티셔츠를 들어 올린다.
어어. 한순간 속옷 밴드 윗부분 5mm 정도를 목도해버린 의주가 당황해서 벌떡 일어선다.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불쑥 긴장감이 차오른다. 니콜라스가 고개를 꺾어 의주를 올려다본다.[미안, 나 나갈게.]
[목걸이….]
“응?”
[나 목걸이 좀 빼줘.]니콜라스가 밑단을 도로 내리고 웅얼거렸다. 꽤 샤프하던 말투가 둥글어졌다. 의주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아서, 목걸이를 돌려 후크를 어렵지 않게 빼낸다. 줄곧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의주의 손가락에 말려 금세 정리되더니, 협탁에 놓였다.[나갈 테니까 씻고 자. 칫솔 이거 쓰면 돼.]의주가 새 칫솔을 뜯어주며 말했다. 니콜라스가 일어나 앉아 하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주가 방문을 닫고 나오자 B가 웃었다.“너도 오늘 좀 마셨나 보다. 얼굴이 빨간데.”

* * *

크리스마스 당일.의주는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B 대신 낯선 남자가 바로 옆 방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은 좀 미묘하다. 전날 의주 기준으로 많이 마신 편은 아니어서, 침상에서 벌떡 일어서도 딱히 머리가 아프거나 울리거나 하진 않았다. 거실로 나가기 전 혹시 몰라 머리를 대충 빗는다.방문을 열자 바로 보이는 낯선 인영에 의주는 머리 빗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니콜라스가 어제 의주가 빌려준 옷을 입고 부엌에 서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의주 나름대로 열심히 고른 건데도 흉통이 생각보다 딱 맞아 보인다. 니콜라스가 케흑, 하는 소리와 함께 컵에서 입을 떼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인사했다.“Merry Christmas.”어제도 느꼈는데, 영어 발음이 참 근사하다. 의주 본인이 줄곧 한국식 영어만 써와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의주도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메리 크리스마스.”눈을 굴리던 니콜라스가 손을 모으며 속사포로 사과하고 나섰다.[어제는 폐를 끼쳐서 미안. 내가 원래 술에 좀 약해서….]
[아니야. 하나도 안 힘들었어. 옷은 안 불편했어?]니콜라스가 티셔츠 밑단을 잡아 뜯듯이 만지며 다급히 말했다.[아, 미안. 지금 돌려줄게.]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천천히 돌려줘.]다시 대화가 끊겼다. 미치겠네. 의주의 시선이 오갈 데 없이 방황한다. 니콜라스 역시 대단히 어색한 동작으로 컵을 싱크대에 올려놓고 있었다.“그….”의주가 입을 떼자 니콜라스가 화들짝 놀라 다시 이쪽을 쳐다보다가 다시 눈을 피한다. 아. 의주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숙취가 영어로 뭐지?“Do you have headache or something…because of alcohol?”
[아, 아니. 전혀. 괜찮아.]니콜라스가 과장된 언사로 대답했다. 그래도 어제 그렇게 꼴았는데…. 의주는 목덜미를 매만지다가 냉장고를 열어 숙취해소제를 꺼냈다. 근데 숙취해소제는 또 영어로 뭐지. 산 넘어 산이다.“…Even so, you'd better eat this. This is a potion…for drinkers.”니콜라스는 약간 미묘한 표정으로 오케이, 땡큐, 하고 숙취해소제를 받아 들어서 냄새를 맡더니, 한 모금 마신다. 그러자마자 얼굴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진다.[쓴 거 잘 못 먹어?]니콜라스가 인상을 잔뜩 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열성적으로 끄덕인다. 의주가 조금 웃는다. 단순한 매력이 있다고 해야 하나. 삼겹살 좋아하고, 쓴 거 싫어하고, 술 못 먹고.[의주는 이거 안 먹어? 좀 남겨줄까?]
[나는 어제 술 별로 안 먹어서 괜찮아. 너 많이 먹어.]
[…B가 없어, 근데.]
[운동 갔을 거야. 아침은 먹었어?]
[아니. 근데 평소에 잘 안 먹어.]
[근데 그거 먹었으면 아침도 먹는 게 좋아.]니콜라스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호언장담하고 나섰지만, 의주도 삼시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편은 아니어서 약간 곤란할 뻔했다. 다행히 비비고 밀키트가 있었다. 물을 올리는데, 숙취해소제 한 병을 10분 동안 마시던 니콜라스가 알짱대며 물었다.[이거 뭐야?]
“갈비탕.”
“갈비탕?”
“응. 미트 수프.”아. 궁금증을 해결한 니콜라스가 주위를 다시 어슬렁댄다. 니콜라스를 힐끗대던 의주가 묻는다.[니콜라스, 오늘 뭐 계획 있어?]
[응? 아니. 근데 놀러가고 싶기는 해.]
[놀러가서 주로 뭐해?]
[아마 쇼핑? 근데 음악 들어도 돼?]
“응.”니콜라스가 웬 블루투스 스피커를 꺼내서는 휴대폰과 연결했다. 쪼그려 앉아 음악을 찾는 것 같더니, 생각보다 큰 음량으로 머라이어 캐리의 익숙한 수금가가 나온다.[크리스마스니까.] 의주가 의아한 기색으로 돌아보자 니콜라스가 큰 소리로 말했다.크리스마스에 직접 캐럴을 틀어본 게 얼마 만이지. 의주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밖에서 틀어주는 캐럴은 많이 들었는데, 집에서는 음악을 잘 듣지 않아서 그럴 일이 별로 없었다. 애초에 크리스마스를 크게 기념할 만한 일로 생각하지 않기도 하고. 미국에서 온 니콜라스는 좀 다르게 생각하려나. 하긴 의주가 특별히 메마른 편인 것 같긴 하다. 경쾌한 반주 사이로 머라이어 캐리의 보컬이 고막을 강타한다. 니콜라스가 주위를 어슬렁대며 캐럴을 흥얼거리자 급조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흐른다.[와서 먹어봐.]니콜라스가 강아지처럼 후다닥 뛰어와 자리에 앉자, 의주가 앞에 그릇을 가져다주었다. 그릇도 수저도 하나뿐이었다. 당황한 낯의 니콜라스가 묻는다.[의주는?]
[나는 조금 이따 나가야 돼. 약속이 있어서.]아. 니콜라스가 입을 합 다물었다. 의주는 냄비에 물을 받아 싱크대에 내려두었다.[먹지도 않는데 나 때문에 괜히 차리게 했네.]뭐? 알아듣지 못한 의주가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꺼내다 말고 되물었다. 니콜라스가 어휘를 바꿔서 조금 또박또박 느리게 말했다.[혼자 먹어서 미안해.]
[아니야, 넌 어제 처음 왔잖아.] 의주가 웃으며 말하고는 요구르트를 입에 털어 넣었다. [곧 있으면 B 들어오니까 모르는 건 물어봐. 아마 B가 같이 놀러가자고 할걸. 그리고 현관 비밀번호 가르쳐줄게. 메모할래?]
[기억할게.]
[그래.]의주가 비밀번호를 가르쳐주자 입엣말로 비밀번호를 외우던 니콜라스가 문득 물었다.[누구랑 약속이야?]
[고등학생 때 친구들.]아하. 니콜라스가 다시 입을 다물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의주가 화장실로 들어가자, 니콜라스가 그제야 수저를 들었다. 맑은 국물을 빤히 쳐다본다. 캐럴은 어느새 신들린 애드리브와 함께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baby….

* * *

의주는 별일이 없는 한 고등학교 동창들과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고등학생 때부터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애인이 있었던 3년 전 크리스마스를 빼놓고는 대부분 참석했었다.오후 5시쯤 되어, 그 나물에 그 밥끼리 그럭저럭 웃고 떠들었던 의주가 슬그머니 발을 뺐다. 내일 오전부터 계절학기 강의가 있기도 하고, 어제 쓸데없이 좀 달렸더니 기력이 쇠한 것 같아서였다. 이대로라면 모레쯤 방전될 것이 자명했다. 야유를 뚫고 빠져나온 의주가 버스를 타고 다시 오피스텔로 귀가했다. 크리스마스긴 한데, 날씨가 그렇게 춥진 않고, 하늘은 희끗하니 흐리기만 하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인지 미디어 속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겪은 지 제법 오래된 것 같다. 의주는 스쳐 지나가는 상가들의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길거리의 트리 같은 것을 유심히 보다가, 문득 오늘 아침 니콜라스가 재생했던 캐럴 플레이리스트를 떠올렸다. 아마 니콜라스와 B는 자리를 비웠을 것이다. 살뜰한 B는 예비 처남을 방에 박아두고 홀로 크리스마스를 즐길 위인은 못 되니까. 정확히 전해 들은 바는 없지만 이번 크리스마스 계획은 니콜라스 맞춤으로 짜둔 것 같았다.크리스마스라. 의주가 차창에 이마를 박고 생각에 잠겼다. 의주에게 좀 특별히 다가왔던 크리스마스는 몇 번 없긴 한데, 가장 최근은 아무래도 3년 전의 일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사귄 여자친구와 맞이하는 첫 크리스마스였으니까. 그때 기분으로는 5년도 가뿐히 사귈 것 같았는데, 막상 그렇지는 않았다.그 친구와는 제법 오래 사귀었다. 취향도 잘 맞았고, 둘 다 그럭저럭 친절하긴 하지만 약간 무심한 편인 성격도 비슷했다. 둘은 신입생 때 교양 강의에서 안면을 트고 나서 친구로 지내다가 자연스레 연인으로 발전한 케이스였다. 같이 있으면 편했고, 대화의 흐름도 막힘없었다. 뭐든 능숙하게 받아치고 꼼꼼하게 살펴주는 당시 여자친구를 보고 의주가 이런저런 미래를 그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다. 그렇지만 이듬해 가을에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받았다. 대체 왜? 어리둥절한 의주의 얼굴에 그 친구는 좀 웃었다.“시간 낭비는 그만해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소리야?”
“너도 날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 나도 널 그렇게 좋아하지 않잖아.”의주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고, 두세 번인가 더 붙잡았지만 대화는 그대로 평행선을 달렸다. 좋아한다는 건 대체 뭐지. 심지어 길거리에서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널 좋아하는 게 맞는 거라고 크게 말했는데도(지나가던 할아버지가 한창때다, 하고 소리쳤다), 그쪽의 입장은 굳건했다.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불같고 맹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의주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연애를 그렇게 꼭 죽을 것 같이 해야 해?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잔잔하게도 할 수 있는 거잖아? 너에게 하는 존중과 배려는 그럼 사랑에서 비롯된 게 아니면 대체 뭐야. 난 네가 그쪽을 더 선호하는 줄 알았는데, 나처럼…. 그 일은 의주에게 꽤 충격적이었지만, 휴학한 뒤 몇 달 생각해볼 시간을 가지고 군대를 다녀오면서 종내에는 극복했다. 정말로 사랑이 아니었나 봐. 이제는 얼굴도 흐릿한 그 친구는 중견 기업에서 인턴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어쨌든 이제 귀가하고 나면 크리스마스도 곧 끝날 테니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드는 듯도 해서, 의주는 차창에 이마를 박은 채로 블루투스 이어폰을 연결하고 적당한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재생했다. 그래도 머라이어 캐리는 워낙 많이 들었더니 좀 질리는 감이 있다.버스에서 내려 오피스텔 현관까지 왔을 때는 다섯 번째 곡이 재생되고 있었다. 조금 전의 기분은 싹 잊어버린 의주가 내일 있을 강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바로 그 앞에 선 니콜라스가 보였다. 현관문 앞에 망연히 서 있던 니콜라스가 때맞춰 의주 쪽을 돌아본다. 크리스마스, 한겨울의 공기에 새빨개진 코끝과 미묘하게 풀어진 표정, 약간 곱은 손끝. 무슨 자신감인지 패딩 대신 터틀넥 니트에 코트 차림이다. 귓불에 걸린 링 피어싱이 살짝 흔들린다.눈이 마주치자 의주는 순간 기억을 더듬어 현재 에어팟에서 재생되고 있는 노래의 제목을 가까스로 떠올린다. 그웬 스테파니의 You make it feel like Christmas. 아마 맞을 것이다. 의주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합창제에서 옆 반이 불렀던 노래니까. 의주는 꽤 당황했던 것 같다. 영어보다 한국말이 먼저 튀어나왔다.“여기서 뭐 해?”어? 갑작스러운 한국말 공격에 더 당황한 니콜라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보니 귀가 아예 꽁꽁 얼어 있다.[내가 비밀번호 알려줬잖아.]
[까먹었어.]
[전화라도 하지.]
[뭐로?]니콜라스의 반문에 갈 길 잃은 의주의 입이 한동안 벙긋거리다 말없이 비밀번호만 빠르게 연타하고 문을 열었다. 의주는 빠르게 움직여 거실에 깔린 전기장판 전원을 켜고 이불을 가져다 놓는다. 얼빵하게 따라 들어온 니콜라스는 눈치를 살피다 도로 의주의 옷으로 갈아입고 손을 씻었다. 니콜라스가 나오는 걸 확인한 의주가 묻는다.[얼마나 있었어?]
[30분.] 니콜라스가 순순히 자리에 앉아 이불을 끌어안은 채로 대꾸했다.
[진짜?]
[의주는 참 다정하네.]“응? 응.” 의주가 건성으로 대꾸하며 후드집업을 하나 찾아주었다. 니콜라스가 다시 한번 코를 훌쩍이며 후드집업을 껴입었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이마에 손을 대보며 물었다. [마실 것 좀 줄까?]
그러자 니콜라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장 부엌으로 달려갈 준비 만반이던 의주가 도로 앉으며 의문을 표했다.[왜? 따뜻한 거 먹으면 금방 따뜻해질 텐데.]
[괜찮아.]
“아직 이렇게 차가운데.”의주가 중얼대다 무심결에 손을 뻗어 니콜라스의 귀를 건드렸다. 그러자 니콜라스가 순간 머리를 뒤로 빼며 파드득 놀란다. 당황한 의주가 눈을 끔벅이고, 약간 얼굴이 벌게진 니콜라스도 눈을 동그랗게 뜬다.[…아, 미안. 차가워 보여서.]의주가 머쓱하게 변명하며 슬쩍 일어나려 하자, 니콜라스가 다급하게 의주의 팔뚝을 잡아챈다.[놀라서 그래. 사과하지 마.]
[알았어….]분위기가 급속도로 어색해졌다. 이거 뭐 어떻게 해야 돼. 여자친구 자취방에 처음 놀러갔을 때나 반에서 홀로 특정 대학에 합격했을 때보다도 더 어색한 것 같다. 어째서? 의주의 두뇌는 그 질문에 쉽사리 답할 수 없었고, 그러느라 두 사람의 호흡이 한동안 엇갈려 숨소리만이 오디오를 약간이나마 채운다. 익숙한 긴장감이 의주의 척수를 따라 올라간다. 니콜라스가 뚝딱대며 팔뚝을 움켜쥔 손을 내렸다. 의주도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해댄다.[따뜻한 거 뭐라도 줄게.]
[괜찮다니까!]그러나 의주는 기어코 자리를 뜨더니 서랍을 뒤져 핫팩 몇 개를 가져왔다. 마실 건 아니니까.[손난로야?]“응.” 의주가 열심히 흔들어 니콜라스에게 건넸다.니콜라스는 차츰 뜨거워지는 핫팩을 움켜쥐었다 풀었다 하며 바스락댄다. 그러더니 핫팩 처음 써보는 사람처럼 실실 웃는다. 뜨거워진다, 이거. 보다 못한 의주가 핫팩을 흔들어 니콜라스의 귀에 가져다 대자, 니콜라스가 또 실없는 소리나 해댄다. 와, 이거 ASMR 같다, 의주.[이렇게 해. 밖에 오래 있어서…머리도 아플 텐데.]언어의 장벽으로 인한 약간의 버퍼링 끝에 의주는 하고자 하는 말을 확실히 정했다. 니콜라스는 다시 눈만 깜박거린다. 의주가 정적을 참지 못하고 다시 말을 건다.[B는? 왜 혼자야?]사실 하고자 했던 말은, B는 뭐하길래 미련하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느냐, 였는데 언어적 한계로 의주는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니콜라스는 냉큼 대답한다.[내가 먼저 집 가고 싶다고 해서 왔어. B는 잠깐 구청에 들러야 한대서.]
[왜? 같이 오지.]
[그러게.]
[왜냐니까.]그러나 니콜라스는 싱글싱글 웃으며 핫팩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의주는 입술을 앙다물고 괜히 화난 체 니콜라스를 흘겨보았다.니콜라스는 전기장판에서 뒹굴면서 의주가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철 지난 티셔츠에 복슬복슬한 수면바지를 입고는 멀뚱멀뚱 의주를 구경하는 양을 보니, 의주는 어제 니콜라스를 처음 본 일이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명문 아트 스쿨에 다니는 전도유망한 포토그래퍼도 사람이구나 싶달지.어느덧 저녁을 먹어야만 하는 시점이 다가왔다. B는 늦을 것 같다는 소식을 보냈기에 둘이서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크리스마스의 양상이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바람에 의주는 다소 당혹스러웠다. 상의 끝에 배달 음식을 시켜 먹기로 했다. 냉장고에 음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남은 반찬 대충 꺼내다 먹기는 좀 그랬다. 의주가 배달 앱을 켜서 화면을 주구장창 내리고 있자 니콜라스가 고개를 숙여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직도 똑같은 샴푸 향이 난다. 샴푸를 따로 가져온 걸까.[먹고 싶은 거 있어?]
[난 가리는 거 없어.]그럼 더 어려운데. 의주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방황한다. 피자? 좋아. 파스타? 좋아. 꿔바로우? 그것도 좋지. 전부 비슷한 대답이 돌아오자 의주는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다 좋대, 다. 라이크라는 단어를 이렇게 단기간에 많이 들어본 건 또 처음이다.[뭐든 선택은 해야지.] 의주가 결국 입을 댔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인걸. 영어로 연속을 뭐라고 할지 몰라서 말하지는 못했지만.[근데 난 정말 아무거나 좋은데.]
[…치킨 어때? 먹어봤어, 치킨?]니콜라스가 의주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삼겹살 잘 먹었으니 치킨도 잘 먹겠지. 의주는 무난한 선택을 지향했다. 배달과 포장. 걸어서 왕복으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배달비도 아끼고, 서로 어색할 일도 없고. 나쁜 방안은 아니다. 의주가 곁눈질로 니콜라스를 힐끗거렸다. 하지만 거실에서 눈만 도록 굴리는 니콜라스를 두고 가기는 좀…. 결국 배달을 선택한다.넷플릭스 볼래? 의주가 묻자 니콜라스가 약간 미묘한 표정으로 좋다고 대꾸했다. 니콜라스가 무릎을 세워 텔레비전 화면에 뜨는 영화 목록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동안, 의주가 눈치를 살피며 방향키로 목록을 훑었다. 영화도 본인은 다 잘 보니까 의주가 골라도 된다고 해서 리모컨을 잡기는 했지만, 사람이 사람이다 보니 아무거나 틀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사진 전공이라는데, 잘못해서 영상미 구린 걸 잡으면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게 흘러가는 건 아닌가 싶어서. 아니면 지금이라도 클래식하게 영화 채널에서 연속 방송하는 나 홀로 집에, 혹은 해리 포터로 넘어가야 할까. 고민하는데 니콜라스가 불쑥 질문한다.[이거 볼까?]커서가 어떤 영화에 올려져 있었다. 그럴까…. 의주는 무작정 영화를 클릭하고 본다.니콜라스에 따르면 원제는 <A River Runs Through It>. 국내 상영 제목은 <흐르는 강물처럼>. 의주는 들은 적도 없는 영화인데, 1992년 개봉해 다음 해에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은 유명한 영화라고 했다. 니콜라스가 영화를 재생하자 의주가 거실 불을 끄고 와서 자리에 앉았다. 사람 한 명이 빠듯하게 앉을 수 있을 만한 틈을 두고 둘 다 소파에 앉았다.영화는 잔잔한 내용이었다. 니콜라스는 실험적인 기법을 추구하니까 보자는 영화도 제법 추상적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직관적인 플롯과 잘 짜인 연기, 전체를 아우르는 촬영. 플라잉 낚시 장면은 몇 번 본 것 같기도 하고. 내리쬐는 햇살과 반짝이는 윤슬, 호수와 인간과 낚싯대를 동시에 엮어내는 촬영 구도. 확실히 영상미가 있다고 의주는 느꼈다. 영화를 자주 보거나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모르지만, 아카데미라니까….아침부터 일어나서 살짝 피곤했던 의주는 거의 졸 뻔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옆을 곁눈질하니 니콜라스가 영화 시작과 거의 비슷한 자세로 화면을 꼿꼿이 응시하고 있었다. 어제부터 꽤 바삐 움직이며 이리저리 눈치 보고 곧잘 시선을 빼앗기던 눈동자가 정면을 향해 딱 고정된 채 무섭도록 빛나고 있었다. 정말 좋아하는 영화인가 보네. 때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집중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의주가 재빨리 치킨을 받아왔지만, 니콜라스는 어느새 의주 뒤에 바싹 붙어 있었다.“깜짝이야.”무심코 내뱉은 의주가 겸연쩍게 웃었다. 니콜라스도 뉘앙스로 대충 눈치채고 따라 웃는다. 탁자에 치킨을 세팅하자 니콜라스가 젓가락 한 짝으로 치킨 조각을 푹 찍으며 말했다.[이 영화, 에세이 쓰려고 재작년 대학 수업에서 처음 봤어.]
[정말?]
[응, 전공 쪽은 아니고 필름 연출 수업이었는데 재밌게 들었어. 잘하진 못했지만. 크리틱에서 진짜 평생 들을 욕은 다 들었는데.]
[그럼….] 의주가 버벅댔다. 교양이 영어로 뭐지? [다른 전공 수업을 들은 거야? 아니면, 음, 일반적인….]
[아, 그건 필름 미디어 연출 전공이 많이 듣긴 하는데. 어떤 전공 수업이라고 딱 정해진 건 없어. 그냥 듣고 싶은 거 막 들어도 돼.]와, 신기하다. 오늘 아침에도 전공 이수 학점 세면서 계절학기 3번을 나야 한다는 계산을 마쳤던 의주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도 되는구나. 그렇다고 해서 의주가 그 학교에서는 다른 전공을 들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의주는 니콜라스의 도전이 퍽 신기했다. 그것도 별다른 것 없다는 말투로 선선히 말하는 그런…기세랄지, 패기랄지, 아무튼 그런 것들이.[새로운 공부를 하는 게 어렵진 않아?]
[어려워. 근데 새로운 걸 하는 게 같은 걸 계속하는 것보다 나아. 나는 원래 한 분야만 파는 걸 잘 못하기도 하고. 난 뭘 좀 하면 금방 방향을 잃어버리거든. 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새로운 걸 하면 그걸 깨우칠 때까지는 그것에만 몰두할 수 있으니까.]의주는 빠르게 말하는 니콜라스의 말을 반쯤 놓쳤으나 입을 닫았다. 치킨을 우물거리던 니콜라스가 이를 눈치채고 다시 쉬운 언어로 말을 정제했다.[난 새로운 걸 하는 건 항상 좋아하거든. 도전을 하면 다른 생각이 없어지니까.]
[미안, 내가 영어를 잘 못해. 빠르게 말하면 조금 어려워.]
[아냐, 내가 문제지. 사실 나한테 맞춰주기도 어려울 텐데.]
[그렇지 않아. 이번 기회에 영어도 조금 연습해 볼 필요가 있지. 외국인과 말해본 적이 거의 없거든.]
[그래? 흥미롭네.] 니콜라스가 재밌다는 듯 활짝 웃었다. [난 매일 외국인과 얘기하는데.]
[사실 난 해외에 나간 적이 한 번뿐이야.]
[진짜? 왜?]오히려 나한테는 해외 나가는 게 더 신기한데. 의주의 혀에 다시 버퍼링이 걸렸다. 신기하다를 영어로 뭐라고 하지. 오히려는? 니콜라스가 치킨 조각을 씹다 말고 말했다.[말하기 어려우면 번역기 써도 돼.]
“아….”
[한국말 쓰는 거 듣고 싶어. 한국 오긴 했는데, 다들 영어 써주니까….]니콜라스가 겸연쩍게 웃는다. 잠시 멍청하게 니콜라스를 바라보던 의주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번역기를 켜고 약간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나에게는 해외로 가는 게 더 신기하게 느껴져. 항상 한국에 있는 게 기본값이야.”정지 버튼을 누르자 유창한 AI 음성이 나온다.“To me, going abroad feels even more interesting. My default is to always be in Korea.”아.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위로 올려다보는 눈길과 솟아오른 광대, 길게 벌어지는 입술이 장난스러워 보인다. 의주는 번역기를 사용한 문장도 본인의 어휘와 크게 달라지지 않으며 미묘한 뉘앙스를 전달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깨닫고 어색하게 번역기를 종료했다. 그러자 니콜라스가 의주의 손을 살짝 쳐내며 묻는다.[왜? 재밌는데. 나도 해볼래.]
[음…. 그래.]녹음 버튼을 누른 니콜라스가 의주의 휴대폰에 대고 눈을 치떠 의주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낮은 중국어를 발음한다. 영어를 유창하게 쓰는데도, 실제 모국어에서는 어딘가 집어내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차이가 느껴진다. 니콜라스가 발음하는 중국어는 예스러운 데가 있다.“그럼 언젠가 한 번 미국으로 놀러 와. 첫 해외여행을 좋은 기억으로 만들어줄게. 자신 있어.”
“고마워.”뭐라고 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던 의주가 겨우 한마디 했다. 낭랑한 한국어 발음이 그칠 때까지 의주의 맥이 펄떡였다. 전역 이후 매 학기 계획이 빠듯해서 미국까지 가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그건 힘들 것 같다고 잘라 말하고 싶진 않았다. 궁금하기도 했다. 미국의 C 예술대학, 사진 전공, 전공 구분이 따로 없는 추상적인 수업. 의주의 순진하고 짤막한 대답에 니콜라스가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네가 발음하는 한국어가 좋아.”
“그래? 영어를 못해서 그런가….”
“뭐?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내 중국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영어랑 비교해 보면.”
“좋아. 영어보다 더 근사하게 느껴져. 물론 네 영어도 좋지만.”
“예의상 말한 거 아니야?”
“내가 뭐 하러 그러겠어.”
“그럼 난 네 앞에서 중국어로만 할게.”
“그러지는 마…. 난 지금도 좀 복잡한데. 네가 좋다면 가끔은 이렇게도 대화하자.”
망설이던 의주가 휴대폰을 니콜라스에게 넘겨주는 대신 다시 녹음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대화하니까 우리가 서로의 언어를 알았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번역기로는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모두 전하지 못하는 것 같아. 영어로 말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니콜라스가 휴대폰의 AI 음성에 귀를 기울이더니 눈을 들어 의주를 쳐다본다. 이제 어색하게 눈을 피하지는 않네. 의주가 무심코 생각하던 찰나, 니콜라스가 입을 열었다.“令⼈驚訝的是、你似乎是個只有優點的⼈。 很親熱。 我要是能像你⼀樣說話就好了。”
[너 녹음 버튼 안 눌렀어.]
[알아.]가끔 니콜라스는 이렇게 뜻 모를 행동을 한다. 의주가 니콜라스를 차근차근 파악해 나가는 걸 꺼리는 것처럼, 본인에게 꼭 마디마디의 공백을 쌓아둔다. 그건 니콜라스를 더 신비하게 만들기도 하고, 조금은 애처럼 보이게 하기도 한다. 의주는 그게 싫지는 않았다.어느새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 * *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B는 유럽으로 떠났다. 집에는 둘만 남았다.의주는 바로 이어진 계절학기 개강으로 조금 바빴다. 본래는 지난 학기에 들었어야 하는 전공 수업인데, 시간표가 좀 꼬여서 계절학기로 듣게 됐다. 내용이 뭐…. 죽을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지만, 계절학기가 늘 그렇듯이 하루에 2주 치 진도를 다 빼야 하니까 과제가 좀 많았다. 게다가 이번 방학에는 심포지엄 신청해 놓은 것도 있어서 다다음 주부터는 더 바빠질 예정이다. 의주는 오전 9시에 강의실에 도착해 책상에 앉아 있노라면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말에는 동아리에서 불러댔다. 모레도 이딴 식으로 등교해야 한다고? 영하 11도의 살을 에는 추위에서 목도리와 롱패딩으로 무장한 의주는 정신이 아득해졌다.코를 훌쩍이며 귀가한 의주가 부산스럽게 목도리를 풀고 있자, 니콜라스가 방문을 열고 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왔어?”니콜라스는 최근 몇 가지 한국말을 배웠다. 왔어? 라든가, 잘 먹겠습니다 같은 일상적인 언어들. 의주나 B에게 직접 물어 습득하는 것보다는 혼자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깜짝 이벤트처럼 불쑥 말하는 식이다. 특히 의주 앞에서는 더 그랬다. 의주는 니콜라스가 처음 왔어? 를 시도했던 때가 선명하다. 니콜라스는 의주가 귀가하자마자 튀어나와서는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왔어? 하고. 처음에는 한국말인지도 몰랐다.“뭐야?” 5초 버퍼링 끝에 알아들은 의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볼록하게 올라온 동그란 광대에 설렘이 묻어난다.[이거 맞아? 궁금해서 공부했어.]
[맞아. 공부 잘 찾아서 했네. 똑똑하다.]의주는 니콜라스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니콜라스도 의주 앞에서 괜히 어슬렁대며 한두 마디 던지고는 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다녀오겠습니다 같은 길고 헷갈리는 존대 문장은 여전히 좀 어려워하지만, 반말로 된 짧은 인사는 곧잘 익혔다.의주도 니콜라스를 따라 중국어를 조금 배웠는데, 니콜라스와는 달리 일상에서 직접 묻고 배우는 스타일이다. 니콜라스가 한국말로 던지는 인사는 대부분 의주도 배웠다. 니콜라스가 왔어? 하고 물으면, 의주도 回來了, 하고 대답하는 식이다. 결론적으로는 한 집에서 3개 국어가 소용돌이치게 됐다.[오늘은 안 나갔네?]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3주 전, 갑작스러운 외국인 하우스 메이트 제안에 의주가 난색을 보이자 B는 전혀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며 덧붙였었다.“니콜라스는 예전에도 한국에 여러 번 왔었고, 친구도 여럿 있어. 그렇게 챙겨야 할 부분은 없을 거야.”과연 그 말대로였다. 니콜라스는 매일 같이 밖을 돌아다녔다. 뭘 했느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달랐다. 26일은 쇼핑, 27일은 전시, 28일은 산책만 두세 시간을 했다고 했고, 바로 어제인 29일은 출사…. 의주가 궁금해하자 어느새 노트북에 백업까지 마친 사진도 몇 장 보여줬다. …이게 서울? 이런 데가 있다고? 이후로 의주는 니콜라스보다 서울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졌다. 의주가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니콜라스가 집에 있던 것은 12월 30일, 오늘이 처음이었다.[오늘은 쉬어?]
[오늘은 쉬고, 새벽에 나갈 거야.]
[왜?]혹시 뭐 오징어라도 잡으러 가나.[해 뜨는 걸 찍으러 가려고.] 니콜라스가 배낭을 끌고 오며 말했다. [해 뜨는 건 왜? 오늘은 30일인데.]
[31일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좋은 사진을 찍기가 힘들잖아.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 일출도 중요해.]왜? 송구영신이잖아. 반박하려던 의주는 송구영신은 또 영어로 뭘까…싶어졌다. 대충 눈치챈 니콜라스가 대꾸했다.[올해는 나에게 정말 힘든 해였는데, 어쨌든 잘 이겨냈잖아. 그런 의미로. 그리고 다음 해도 잘 이겨내고 싶고.]니콜라스가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 렌즈를 가까이서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며칠 전 카메라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을 듣긴 했는데 전부 까먹었다. 니콜라스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카메라 상태를 확인하며 짐을 싼다. 의주가 옆에 쪼그려 앉아 물었다.[올해가 힘들었어?]
[응. 많이 힘들었지. 생각할 것도 많았고.]
[해결은 잘 됐어?] 의주의 물음에 니콜라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사실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어. 1년쯤 생각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문제도 있나 봐.]
[나도 가도 돼?]의주가 즉흥적으로 물었다. 때로는 뇌보다 입술에서 먼저 튀어나오는 것 같은 말이 있다. 의주 자신도 까닭을 모르는 제안이 날아오자 니콜라스가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의주를 바라본다. 눈이 마주친다.
전에도 느꼈지만, 낯을 가리고 가끔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치고 눈빛이 직선적이고 끈질기다. 의주의 홍채 무늬 하나까지 훑어 올리는 듯한 시선에 의주가 눈을 깜박여 시선을 흩뜨렸다.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간신히 풀고 고개를 떨군다.[왜?] 니콜라스가 웃었다.
[나도 올해의 마지막 일출이 궁금해서.]
[일출이 다 똑같지.]
[같이 보는 사람이 다른데, 어떻게 같아?]
[나랑 보는 일출은 특별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잖아. 차 태워줄게.]
[의주, 차도 있어?]
[아니, B 차.]

* * *

두 사람은 새벽에 일어났다. 평소 야행성이던 니콜라스는 아예 밤을 새우고자 했지만, 의주가 이를 악물고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서너 시간을 자고 출발했다. 잠이 덜 깬 상태의 니콜라스는 도무지 넓어질 줄 모르는 미간을 하고 어리바리하게 행동했다. 자꾸 뭘 하나씩 두고 오는 바람에 출발이 10분 정도 지연되었다. 의주도 상태가 만만찮았다. 그러잖아도 계절학기 때문에 꼬박꼬박 일찍 일어나는데, 충동적으로 휴일도 반납하고 등산길에 참여했으니 알 만하다. 그냥 들어가서 다시 자고 싶은 욕망이 샘솟는다. 잠긴 목소리에 표정도 안 좋은 니콜라스를 보니 더더욱. 지금 들어가서 자자고 하면 니콜라스도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의주가 운전석에 앉아 멍을 때린다.“의주.”또 뭐시기를 두고 왔다던 니콜라스가 운전석 차창을 두들겼다. 의주가 차창을 내리자 니콜라스의 팔이 쑥 들어온다. 의주의 뺨에 따뜻한 것이 닿고 의주가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아챈다.따뜻하게 데운 캔 커피다. 의주가 커피를 확인하는 사이, 니콜라스가 추운지 쓰읍 하는 소리와 함께 조수석으로 빠르게 뛰어들었다. 니콜라스는 제티 캔을 쥐었다.[이거, 뭐야?]의주가 어벙하게 묻자 니콜라스가 왜 당연한 걸 묻냐는 양, 부은 눈을 껌벅이며 답했다.[춥잖아.]
[…고마워.]둘 다 캔을 따서 몇 모금 마신다. 따뜻한 게 몸에 들어가니 솜털이 곤두서는 듯하다. 정적 속에 히터 돌아가는 소리가 웅 하고 울린다. 콘솔박스 앞에 커피와 제티가 나란히 들어섰다.의주는 여태껏 서울에서 일출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니콜라스가 소개한 명소로 향했다. ‘ㄴ’산 중턱에, 가는 데 얼마 걸리지 않고 사람이 적은 데다 비교적 일출이 잘 보이는 포토 스폿이 있댔다. 그런 걸 다 어떻게 아는 거지. 의주는 의아했지만 니콜라스가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그 답을 듣지는 못했다. 의주의 그냥 자라는 말에 니콜라스는 그래도…라며 중얼댄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곯아떨어졌다. 혼자서 갔으면 큰일 날 뻔했네. 의주는 인적 드문 새카만 새벽을 헤치고 나아간다.도착해서는 다시 니콜라스를 깨우는 게 일이었다. 니콜라스의 말대로 목적지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길이 조금 가파르긴 해도 3~40분 정도 걷다 보니 목적지가 나왔다. 의주는 길쭉한 다리와 최근 계절학기로 인한 단련 덕에 그나마 수월히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니콜라스는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꽤 날랜 편이었는데, 근육 솟은 팔이나 널찍한 어깨가 허투루 생기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미리 카메라를 세팅하고 있던 니콜라스가 이제 막 들어온 의주에게 피실피실 웃으며 말했다.[의주는 운동 좀 해야겠다.]
[하고 있는 거야.]
[엥? 진짜?]
[학교 다니고 있잖아.]의주의 말에 니콜라스가 황당한 시선을 던졌다. 의주, 그런 건 운동이 아니야. 나름의 유머가 가차 없이 내팽개쳐지자 의주가 진지하게 받고 나섰다.[너 우리 학교 공학관 어딨는지 몰라?]
[의주네 학교를 어떻게 알아.]
[넌 여기도 알면서 내 학교를 몰라?]
[네가 소개를 안 해줬잖아.]
[여기도 소개받은 데야?]
[응.]
[누구한테?]
[궁금해?]
[응.]
[왜?]
[…궁금할 수도 있지.]의주가 한 차례 물러섰다. 딱히 꼽을 만한 이유가 없었다. 니콜라스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묻는다.[의주 나 좋아해?] 다시 니콜라스의 입에 오르내린 라이크라는 단어에 니콜라스의 말에 의주가 돌처럼 굳었다. 늘어지는 반응에 니콜라스의 인상이 점점 딱딱해지자, 의주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마자 니콜라스가 활짝 웃으며 의주의 어깨를 툭 친다. [나도 의주가 좋아. 좋다는 말이 한국어로 뭐야?]“좋다.”
“좋다.” 니콜라스가 따라 했다. “의주 좋다. …Like this?”의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니콜라스가 중얼거렸다. 좋다, 좋다…. 그러더니 대뜸 묻는다.[물어볼 땐 어떻게 해?]
“좋아?” 의주가 입을 크게 벌려 또박또박 발음한다. 유심히 보던 니콜라스가 입을 열었다.
“나, 좋아?”
“…응.” 의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한다.
[다행이야, 난 의주가 날 싫어할까 봐 걱정 많이 했는데.]의주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널 왜 싫어해?]
[그냥. 날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 해가 언제 뜨지?]
[20분 정도 남았어. 널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니콜라스가 인중을 늘이며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의주를 돌아봤다.[그럼 없어?]
[없을 것 같은데, 널 싫어하는 사람은.]
[왜? 내가 어떻게 보이길래.]
[넌….] 의주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고는 휴대폰을 꺼내 번역기를 켰다. "넌 미운 구석이 없어."
“There is nothing ugly about you.”니콜라스가 눈을 깜박였다. 연말의 추위가 두 사람을 매섭게 쓸고 지나가 머리카락을 온통 헤집어놓았는데도 눈빛은 곧다.“너도, 의주.”
[진심이야.]
[나도 그래. 넌 장점밖에 없는 사람 같다고 생각했어.]
[내가?]
[응. 넌 볼수록 다정한 사람이야. 행동도 말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문데. 오늘 해 보러 같이 나와준 것도 위로해 주기 위해서잖아.]의주는 답할 수 없었다. 정말 위로만을 위한 걸까? 그렇게 희생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는걸. 그 말을 들으니 의주도 그곳에서 니콜라스와 같은 풍경의 같은 해를 보고 싶었을 뿐인데. 의주는 자신도 모르는 행동거지의 까닭에 대해 손쉽게 정의 내린 니콜라스를 혼란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닌데, 같이 가준다길래 그냥 말 안 했어.] 니콜라스가 삼각대 위에 놓인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의주의 표정을 확인한 니콜라스가 웃으며 덧붙였다. [같이 가고 싶어서.]
[그냥 같이 가자고 해도 갔을 텐데.]
[뭐? 그럼 그냥 그렇게 말할걸.]
[같이 왔으니까 그 문제 얘기해주면 안 돼?]
[그래.] 니콜라스가 선선히 대꾸하고는 대뜸 폭탄을 날렸다. [사실 나 이제 사진에 흥미가 없어.]

* * *

운이 좋았던 게 아닐까 한다.운에 기대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17살에 미국으로 들어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카메라를 잡은 것은 운이 좋았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당시에는 새로운 환경에서 낯선 모습들과 얼굴들을 발견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또래에 비해 좀 부족한 영어와 전혀 다른 분야의 공부라는 두 가지 장애물도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매일 같이 대만이 그리웠고 가끔 은연중에 느껴지는 차별적인 시선이나 대우에는 이골이 났지만. 어쨌든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절대 굽히지 않는다는 신조의 니콜라스는 공부든 운동이든 잘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고, 그것은 미국에 와서도 확실히 통했다.꿈에 그리던 예술대학에 붙었을 때는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몇 년을 쏟아부어 만든 포트폴리오가 아깝지 않았다. 자유로운 전공 제도나 P/F 평가 방식도 좋았고, 근사한 캠퍼스와 추상적이고 창의 과제 위주인 커리큘럼도 마음에 들었다. 각자의 세계를 지닌 학생들과 각 분야에서 저명한 교수도. 신입생 때는 코어 프랙티스에서 교수에게 번번이 퇴짜를 맞으면서도 즐거웠다. 대학에서의 첫해를 마무리하며 열었던 전시회에서 작품이 주목받았을 때는 정말 사진만이 천직인 줄 알았다.
문제는 2학년에 들어서였다. 좀처럼 셔터를 누를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본인이 표현할 수도 없었고. 사진을 찍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에게 당당히 내세울 만한 것을 찍어낼 수가 없었다. 아마 교양으로 들었던 수업에서 다룬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다른 포토그래퍼들의 상상 이상으로 창의적이고 기발한 작품들, 예술을 보는 방법과 맥락적인 이해에 대하여 배우면서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정확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는 슬럼프라고 하고, 누군가는 번아웃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니콜라스에게 사진은 포기하라고 했다. 필름 미디어 연출 전공을 들은 건 그래서였는데, 딱히 탈출구를 찾지는 못했다.좀 쉬면 나아지겠지 싶어 충동적으로 휴학을 신청했는데, 대학에서 멀어지고 나니 더더욱 가기 싫어졌다. 재능 있는 젊은 예술가들이 바글바글할 그 대학에서, 딱히 원리도 목적도 영감도 스케치도 없이 부유하다가 얼결에 학기를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 번 마음 먹은 건 굽히지 않으니까. 혹은 단순한 태만이었다.한국에 온 건 누나의 제안이었다. 카메라를 잡은 게 미국에서니까, 색다른 환경이면 또 달라지지 않겠느냐는 취지였다. 어차피 한국에는 여러 번 오간 적이 있기에 니콜라스는 그 말이 딱히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누나의 말을 들어 나빴던 적은 없으니 속는 셈 치고 믿어보기로 했다.그즈음, 의주를 처음 알게 됐다. 의주와 달리, 니콜라스는 의주에 대한 비교적 단편적인 정보만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생이라는 것, 화학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키가 매우 크고 잘생겼으며 착하다는 것. 특이사항이 많은 니콜라스와 달리, 의주는 아직 대학 입학해서 수업을 열심히 들은 것밖에 없으니 당연한 사실이지만. B의 말로는, 의주의 진면모는 직접 만났을 때 알 수 있다고 했다. 의주의 말에는 힘이 있어서, 어떤 말이든 믿게 된다고.
그건 사이비 아닌가…. 어쨌든 니콜라스는 당분간 함께 살 사람과 잘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어 인사도 조금이나마 연습했고,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인상이 무섭다는 소리를 자주 들으니, 웃는 표정을 연습하기도 하고. 누나한테 어떠냐고 물어보니 웃기게 생겼다는 말만 들었지만.
그렇게 마주한 변의주는…정말 의외의 모습으로, 무슨 상상의 동물 같았다. 출구를 빠져나오자 보였던,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면서 얼굴은 조막만 한 실루엣부터 매우 충격적이었다. 목덜미를 살짝 덮는 갈색 머리칼과 둥글게 올라오는 앞 광대, 긴 목, 누군가가 입을 열 때마다 다정하게 맞춰오는 쌍꺼풀 없이 동그란 두 눈, 말려 들어간 입꼬리. 신경이 가닿는 모든 구석이 몽땅 충격적이었다. 아주 건성인 후드 티에 청바지, 롱패딩을 입었는데도 오히려 담백해 보여 좋아 보일 만큼 핏을 200퍼센트 살리는 긴 팔다리, 꾸며낸 데 없는 표정과 말투, 심지어는 부드러운 말씨도. 마치 본인을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를 정반대로 바꿔다 조립한 것 같다고 니콜라스는 느꼈다. 니콜라스는 의주가, 결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점이 좋았다.“나이스 투 밋 유.”츄라고 발음하는 듯한 입술을 보며 니콜라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누나는 역시 틀린 적이 없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 웬만한 부류의 인간은 다 만나 봤다고 생각하는데도, 찾았다. 새로운 사람을.“유 큐트.”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귀여운 사람은 처음이다.문제의 삼겹살집에서는 다소 의외였다. 의주는 그렇게 귀엽게 행동해 놓고 낯선 외국어를 쓰는 상황에서도 일 대 일에서 강했다. 낯을 가리는 편인 니콜라스는 답지 않게 조금 끌려갔다. 다만 의주의 말들은 단순히 거리를 좁히는 것을 위한 스몰 톡일 텐데도, 아주 오랫동안 다듬은 생각을 꺼내는 것처럼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데가 없이 명료한 데다 일단 내뱉은 말이면 무리 없이 끝까지 이어졌다. 또한 니콜라스의 정리되지 않은 말을 경청하여 대화를 이끌어 갔다. 그리고 재미있는 점은,[나한테는 조금…어렵던데.]충동적으로 내던진 질문에 정말 뻣뻣하다 싶을 정도로 진실만을 얘기한다는 것이었다. 니콜라스 본인도 빈말은 잘 못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이런 질문에는 멋지다고 꾸며내서 말해도 상관없을 텐데. 의주의 말에는 힘이 있어서, 어떤 말이든 믿게 된다니. 니콜라스가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의주는 정직하고 차분하고 성실하게 말하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 * *

30일 이후 심리적 거리감이 부쩍 줄어든 둘은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 주제는 들쭉날쭉했다. 주로 대학 생활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각자 분야도 환경도 다르다 보니 공감보다는 흥미가 앞서긴 했다. 니콜라스는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많았다. 다 함께 기획에 밤을 새우다가 술 먹고 뻗어버린 일, 교수 앞에서 큰 말실수를 했던 일, 동기끼리 다른 주로 여행을 갔다가 돈을 다 써버린 일. 의주는 내세울 부분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동아리나 MT 얘기, 이전에 수강했던 황당한 교양 수업, 시험에서 큰 실수를 했다가 기사회생한 경험 등을 진땀 빼며 설명하고 있으면, 니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지하게 경청하다 가끔은 폭소했다.니콜라스의 외출은 이틀에 한 번꼴로 줄어들었다. 31일에는 함께 카운트다운을 셌다. 저녁을 먹고 편의점에 들러 간식을 왕창 사 왔다. 홈런볼? 니콜라스가 과자 매대를 기웃거리다 홈런볼을 주워 의주에게 보였다.[이거 살까?]
[이거 의주 같아.]
[…하나도 안 닮았는데?]아셨죠, 홈런은 자신감. 홈런볼~. 의주가 옛날 광고 카피를 따라 하자 니콜라스가 그게 뭐냐고 웃었다. 뭔 소린지 알아듣지도 못했으면서 웃기는 잘 웃는다. 두 사람은 귀가한 이후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면서 보신각 종소리를 듣다가 서로에게 첫 새해 인사를 건넸다. 해피 뉴 이어.공휴일인 새해 첫날은 온종일 함께 보냈다. 의주가 처음으로 떡국을 시도했던 날. 고명까지 일일이 준비하려니 손이 좀 가는 바람에 예상보다 늦게 점심을 먹었다. 마찬가지로 요리에 연이 없는 니콜라스는 설거지를 했다. 그 외의 시간은 수다로 채웠다. 영어, 한국어, 중국어로. 외국어를 입에 담을 때 두 사람의 말은 한 템포 느려졌다.그렇게 한 주가 흘렀다. 그동안 의주는 외국어를 말해야 할 때, 번역기를 켠 채 그 앞에서 한국어를 또박또박 발음할 때, 니콜라스의 눈을 바라볼 때, 니콜라스가 본심이 어느 정도 섞였는지 알기 어려운 농담을 뱉을 때 느껴지는 긴장감에 대해 생각했다. 니콜라스의 태도는 대담한 듯하다가도 의주를 결코 앞서 나가지 않았기에 의주는 관계 정립에 약간 힘이 들었다. 너 날 좋아해? 따위의 웃기지 않는 농담을 도저히 뻔뻔하게 넘기지 못했고, 엉겨오는 니콜라스의 뜨끈한 체온을 무시하지 못했다. 서로에 대해 알아갈수록, 서로에게 아는 체하는 요소들이 점점 쌓여갈수록, 의주는 불어나는 감정과 달라지는 리액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횟수가 늘어났다.계절학기 중간고사는 어쩌면 의주에게 좋은 핑계였다. 그다음의 한 주를 의주는 공부로 때웠다. 니콜라스는 점점 귀가가 늦어지는 의주에 대해 섭섭한 티를 잔뜩 냈다. 의주는 시험 때문이라고 여러 차례 설명했지만, 사실 도서관에 앉아 있는 시간의 특정 비율은 꼭 니콜라스가 차지한다는 것까지 일러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정하지 못한 진심은 흐물흐물 늘어져 상대방에게서 멀어져갔다. 의주의 망설임 아래 기간제 친구라는 관계가 확고해져 갔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고.니콜라스의 귀국을 일주일 앞둔 시점, 중간고사 결과가 나왔다. 중앙값과 3분위수 사이. 매일 같이 도서관에 들러 공부한 것 치고 그리 점수가 높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억울할 정도로 열심이었던 것은 또 아니긴 해서…. 성적 확인창을 닫은 의주는 눈을 깜박이다가 괜히 유튜브나 넷플릭스 따위의 사이트를 켜고 껐다.적성에 안 맞나?작년 30일에 폭탄을 날렸던 니콜라스는 최근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는데, 의주로서는 그 사라진 영감에 관해서는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의주가 기억하기로 의주의 마지막 창작 활동은 고등학생 때 썼던 독후감…혹은 범위를 좀 넓게 잡으면 여자친구에게 썼던 편지였다. 다행히 해가 때맞춰 떠오르며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의주의 책상 앞에 당시 일출을 찍은 사진이 붙어 있다. 그 길로 즉시 인화해서 의주도 몇 장 받았다. 그중에는 의주를 찍은 사진도 포함되어 있다.[의주, 찍어줄게.]한동안 말없이 사진을 찍던 니콜라스가 돌연 말했었다. 세수만 하고 롱패딩에 모자에 목도리로 꽁꽁 싸맨 채 말단이 전부 얼어버린 의주가 다급히 손사래 쳤다. 왜 하필 이럴 때?[지금 못생겼어.]의주의 말에 니콜라스가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고 눈썹을 들썩였다. 허?“There is nothing ugly about you.”
“아, 제발, 니콜….”
[빨리. 나 사진 잘 찍어.]방금 사진에 흥미 없어졌다고 해놓고서, 카메라를 잡고 다시 자신만만해진 니콜라스는 막무가내로 사진을 찍었다. 니콜라스는 햇빛이나 주변 경관에 맞추어 의주를 이곳저곳 끌고 다니면서 일일이 표정을 코칭하고 나섰다. 그래도 영 각이 서질 않았는지 결국 포기하는 듯하다가, 하산하다 말고 덜컥 플래시를 터뜨렸다.니콜라스가 인화한 것은 그 사진 석 장이었다. 빛도 배경도 제각각인. 약간 놀란 듯한 의주의 표정과 웃기 직전 이미 말려 올라간 입꼬리, 뒤의 앙상한 겨울나무와 어스름한 햇빛, 미묘한 초점. 그런 게 찍혀 있었다. 웃기 직전의 사진 한 장을 제외하고 니콜라스는 나머지 사진을 전부 의주에게 맡겼다. 기껏해야 악보나 솔루션이 붙어 있던 벽에 사진이 다닥다닥 붙었다.의주는 그 사진을 들여다본다. 순전한 재능이 담긴 듯한, 다큐멘터리 한 장면처럼 포착된 일출의 순간들은 실물과 대단히 유사하다. 이걸 찍은 니콜라스도 혼란스러워하는데, 하물며 나는? 의주가 책상 앞에 앉아 사진을 한참 보다가 새 탭을 켰다. 노트북 터치패드 옆을 두드리다 이내 검색한다.Nicholas Wang.스크롤을 조금 내리면 웹사이트가 하나 뜬다. 모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 만든 사이트에 니콜라스의 프로필이 로드되고, 작품 목록을 클릭하자 다소 느리게 작품의 썸네일이 하나둘 보인다. 의주는 작품을 클릭해 큰 화면으로 사진을 본다. 쨍한 원색 옷을 입은 모델 사진 두어 장을 독특하게 합성하여 인공적인 색감을 강조한 대표 작품. 의주가 그것을 빤히 바라본다.“주주, 뭐해?”니콜라스가 대뜸 방문을 열어젖혔다. 깜짝 놀란 의주가 알트 탭을 시도했으나, 엉뚱하게도 화면이 약간 작아지기만 했다. 什麼！ 의주가 중국어로 불평하자 노트북을 확인한 니콜라스가 실실 웃으며 다가온다.“주주!” 니콜라스가 의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 좋아해?”주주는 최근 니콜라스가 의주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의주가 얼결에 줄인 니콜이라는 별명에 대한 보답이었다. 어쩌면 응보. 과할 정도로. 정당방위로는 결코 인정될 수 없는.“你喜歡我嗎? (나 좋아해?)”니콜라스가 킬킬대며 의주의 귀에 대고 느끼한 톤으로 묻는다. 의주가 팔꿈치로 니콜라스의 복부를 밀어내자, 니콜라스가 오버하며 멀어졌다.“停⽌。 (그만해.)”
[진짜 왜 본 거야?]
[너 풍경 잘 찍길래 생각나서….]
[어때, 이거? 너 처음에는 난해하다고 했었잖아.]
[나야 볼 줄 모르니까….]
[엥? 아니야, 주주. 네가 예술을 자주 접하지 않는다고 해서 네 감상이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돼. 애초에 널 이해시키지 못한 나의 문제점인 거야. 데이비드 호크니는 예술의 기반이 대중성이어야 한다고 했어.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고.]니콜라스 특유의 갑자기 쏟아내는 말하기에 비교적 덜 일상적인 어휘가 더해지자 의주가 약간 당황했다. 3주간의 혹독한 리스닝으로도 예측하지 못한 발화에 어안이 벙벙하다. 와, 니콜. 驚⼈的。 (멋지다.)[…너 전문가 같다.]
[재작년에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 지금도 그래? 너에게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아?]
[아무런 느낌은 아니고….] 의주가 고개를 기울였다. [원래도 아무런 느낌도 없는 건 아니었는데. 다시 보니까 널 닮은 것 같기도 해.]
[이거?]“응.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대범하고 직관적인 느낌?”
“주주, 무슨 말.”
[안 가르쳐줘.]
“那真是令⼈噁⼼。”
[그거 나쁜 말이지? 이게 다 너한테 배운 거야.]你的。 의주의 단호한 말투에 니콜라스가 입을 늘어뜨리며 에에, 소리로 불만을 표했다.[내가 언제.]
[넌 항상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하지. 네 말을 전부 녹음해 뒀어야 하는데.]
[나도 그러고 싶다.]
“뭘?”
[의주의 모든 말을 녹음해서, 의주가 듣고 싶을 때마다 꺼내 들으면 좋을 텐데.]
“…왜?”
[전부 기억하고 싶어서. 의주의 한국말도.]
[어떻게 그걸 전부 기억해? 사람이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의주의 대꾸에 니콜라스가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의주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니콜라스의 입술을 살짝 튕겼다. “또 왜, 뭐가 그렇게 심술이 났어?”
“한국어 배울 거야.”니콜라스가 의주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 * *

“정말?”대형 쇼핑몰 6층에 위치한 서점 앞에서 니콜라스가 발걸음을 멈췄다. 의주는 꽤 당혹스러웠다. 한국말을 배울 거라고 이후 몇 번인가 더 선언하긴 했지만,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다. 이제 나흘 후면 니콜라스를 실은 비행기가 한국에서 벗어날 테니까.[정말 한국어 배우고 싶어?]
“응.”니콜라스가 당연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만만하게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영어로 안내가 군데군데 붙어 있어 어렵지 않게 외국어 서적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이 한국인을 위한 교재긴 했지만, 구석에 외국인을 위한 한국말 교본도 있었다. 책등을 손끝으로 훑으며 진지한 태도로 책을 고르는 니콜라스를 바라보던 의주가 어렵게 말문을 텄다.[왜? 한국에 또 오게?]니콜라스는 집중하느라 대답이 없었다. 조바심을 내던 의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나랑만 말 통하면 되는 거 아니야?]
[뭐?] 니콜라스가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그럼 난 너랑만 대화하라고?]
[아니, 난…. 나 빼고 다들 영어 잘하잖아, 네 친구들은….]
[너도 잘해. 그리고 말이 통하는 것과 같은 언어를 쓰는 건 다르잖아. 가끔 의주가 중국어 쓸 때 얼마나 기뻤는데.]
“對不起。”
의주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나름 공부하긴 했는데…. 많이는 못 했던 것 같네. 니콜라스가 한국어 써줬던 데 비하면 많이 모자라고.]
[그건.]
니콜라스가 책을 펼쳐 보다 말고 고개를 들어 말했다.
[의주는 항상 생각해서 완벽한 문장을 구성하려고 하기 때문이잖아. 나랑은 달라. 난 일단 말하고 보니까. 아마 시간이 지나면 의주의 중국어가 훨씬 체계적일걸. 물론 나한테 배우지 않는다면 성조는 엉망이겠지만.]
[너무 좋게 말하는데.]
[내가 생각한 걸 말하는 거야. 그래서 나도 책으로 좀 배워보려고. 뭐가 더 나을까?]니콜라스가 한국어 교재 두 권을 들어 보여주자, 의주가 하나를 골라주었다. 의주도 중국어 교재 한 권을 골랐다. 니콜라스는 본인이 산 한국어 교재는 뒷전이고, 의주의 중국어 교재를 보며 웃기 바빴다.[이거 웃기다. 이런 것부터 배우는구나. 這是我的朋友。]
니콜라스의 손가락이 교재 곳곳의 짤막한 예문을 가리키며 일일이 발음하고 나섰다.
“我真的很喜歡你。”
[너도 그렇거든. 그만 놀려.]의주가 중국어 교재를 닫으며 볼을 부풀려 불만을 표했다. 니콜라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손가락으로 의주의 뺨을 찌르며 웃기나 했다. 의주가 니콜라스의 손을 밀어내며 투덜거린다.[영화 시간 거의 다 됐어.]본래 쇼핑몰에 온 목적이 영화 관람이었다.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애니메이션이었다. 별다른 영화 취향이 없는 의주는 순순히 영화 예매를 마쳤다. 뒤쪽 가운데 자리, 나란히 붙은 좌석으로. 두 사람은 층을 옮겨 영화관에 도착했다. 뭘 먹을까. 그래도 영화관에 온 기념으로 팝콘을 사러 스낵 바 앞에 선 두 사람이 메뉴를 골랐다.[커플 콤보? 콜라 2개에 라지 사이즈 팝콘.]
의주가 한 걸음 뒤에 선 니콜라스를 돌아보며 묻자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료는 콜라로 괜찮아?]
[아이스티.]
“그럼 저희 커플 콤보에 하나는 아이스티로 변경해 주세요.”의주가 익숙한 태도로 주문을 마쳤다. 니콜라스는 그 뒤쪽에서 서성이며 의주가 결제하는 것을 빤히 바라봤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의주가 니콜라스에게 이방인이었던 때. 지금은 시간이 흘러 자신이 니콜라스에게 의지가 되고 있다는 것이 퍽 신기했다.
커플 콤보를 받아 상영관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았다. 평일 낮 애매한 시간대인 데다 개봉한 지 몇 주 지나서인지 생각보다 사람이 몇 없었다. 자녀를 데리고 온 부모가 몇, 성인이 대여섯, 커플 두 쌍 정도. 남자 둘이 온 팀은 의주와 니콜라스뿐이었다. 니콜라스는 리클라이너를 끝까지 젖혀 누웠다.[한국 영화관 좋다.]
광고를 집중해서 보던 니콜라스가 대뜸 말했다.
[팝콘도 맛있고.]
[맛있어? 다행이네.]
[의주도 먹어.]니콜라스가 팝콘을 한 움큼 쥐어 의주의 손에 떨어뜨렸다. 원래는 영화를 볼 때 팝콘을 잘 먹지 않는 편이었던 의주는 다소 생소한 기분으로 팝콘을 씹었다.[아이스티도 먹을 만해?]
[그냥? 버블티 먹고 싶었는데.]
[버블티 좋아해?]
[응.]니콜라스가 대꾸하는 순간 조명이 꺼지더니 영화가 곧 시작했다. 니콜라스가 어두워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우스운 표정을 보여서, 의주는 피식 웃었다.니콜라스는 먼젓번과 같이, 집중한 눈길로 영화를 봤다. 의주는 집중을 하고 싶기는 했는데…. 좀 어려웠다. 일단 영화관이 너무 더워서 머리가 띵했고. 바로 옆에 앉은 니콜라스의 미세한 움직임과 그 존재감이 하나하나 의식되었다. 영화관 좌석이 원래 이렇게 가까웠나 싶다. 팝콘에는 거의 손도 못 댔다. 혹시나 니콜라스와 손이라도 닿을까 봐서. 그러면 너무 당황할 것 같았다. 의주의 귓가에는 니콜라스의 숨죽인 규칙적인 호흡이 한순간도 빠짐없이 의식된다. 이 정도라고? 의주는 약간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손바닥에 배어 나오는 땀을 훑어냈다.갑자기 니콜라스가 의주의 팔을 끌어 팝콘 통에 넣었다. 의주가 놀라 돌아보니 니콜라스가 고개를 기울여 의주의 귓가에 속삭였다.[의주도 먹어.]이윽고 니콜라스가 의주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쳐 의주가 팝콘을 한 주먹 쥐게 했다. 의주가 팔 한쪽에 힘을 주고 천천히 팝콘을 가져왔다.니콜라스는 다시 시선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의주는 손등 위에 남은 감촉과 손바닥 위에 실재하는 팝콘 무더기를 생각하다, 팝콘을 하나씩 집어 먹었다.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팝콘을 전부 집어 먹었을 때쯤 누군가가 코를 훌쩍였다. 어느 순간부터 몰입하고 있던 의주도 코끝이 찡했다. 주인공이 소중한 사람을 위해 희생을 결심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의주는 옆을 슬쩍 보았다. 집중한 니콜라스의 얼굴에는 물기 하나 없었다. 의외네. 감성적인 데 비해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닌가 싶다. 의주는 팝콘을 다시 한 움큼 집었다. 20분쯤 지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다.대부분의 관객이 즉시 나가기 시작했는데, 니콜라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쿠키 영상도 없댔는데, 감명을 크게 받았나. 아우터를 주워 입고 별말 없이 니콜라스를 기다리던 의주는 눈을 깜박이다 짐을 챙기려 상체를 일으켰다. 그때 니콜라스가 뜬금없이 의주의 팔을 붙잡았다. 놀란 의주가 눈만 깜박이고 있자, 건조한 얼굴의 니콜라스가 의주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의주는 어째서인지 니콜라스의 성대에서 울리는 소리가 고막에 가 닿기도 전에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나, 가지 말까?]때로는 입보다 눈빛이 더 많은 걸 말하기도 한다.

* * *

니콜라스는 한국에 2주 더 머물기로 했다. B가 오는 시기에 맞춰 출국하는 셈이다. 의주가 드라마 주인공이나 하다못해 그날 본 애니메이션 주인공처럼 대담하고 자신 있게 내뱉지도 못하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도 니콜라스는 순순히 잡혀주었다. 대만으로 돌아가는 대신, 새로 항공편을 예약하는 번거로움까지 감수하고서도 서울의 비좁은 투룸에 남았다. 니콜라스가 떠나는 날을 의식하며 매일을 살았던 의주는 다시 연장된 그 기간에 기분이 묘해졌다. 마치 시험이 2주 연기된 수험생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수험생은 시험을 두려워하고, 의주는 니콜라스를 좋아한다는 극렬한 차이점이 있지만.‘좋아한다’라는 어휘 선택에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변의주는 자신이 니콜라스를 좋아하는 것이 맞는지 자주 고민했다. 이것이 3년 전이었다면 손쉽게 인정했을 테지만, 꽤 기억에 남는 전 여자친구의 통보를 떠올릴 때면 절로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정말로 좋아하는 게 맞나? 하고. 그러나 얼굴을 볼 때마다 바보처럼 긴장하고, 속이 울렁거리고, 합리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지만, 동시에 얼굴을 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이 비이성적인 감정을 달리 칭할 길이 없다. 전 여자친구에게 가졌던 감정이 이랬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사고는 순환한다. 니콜라스의 반응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복잡한 상태에서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을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 얘기하면 어쩔 건데. 의주는 계속 한국에 있어야 하고, 니콜라스는 2주 뒤면 대만이든 미국이든 가야 하는데. 관계가 그대로 정체했다.최근 니콜라스는 한국어 공부에 열심이었다. 의주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어김없이 니콜라스의 한국어 선생 노릇을 해야 했다. 이전에 일본어를 짧게나마 배운 적이 있어서인지 니콜라스는 한국어를 쉽게 배웠다. 의주는 신입생 때 과외와 학원 아르바이트를 몇 탕 뛰어본 적이 있는데, 그간 본 중에서 니콜라스는 손에 꼽을 정도로 영리하고 착실한 학생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문장까지 의주에게 전부 발음시키면서 짓궂게 구는 점만 제외하면.
의주도 니콜라스를 따라 중국어 공부에 열을 올렸다. 니콜라스가 시시때때로 내뱉는 중국어를 하나둘씩 해석해 나가는 재미가 있었다. 니콜라스의 뇌를 지배하는 생각에서 해석할 수 없는 것의 파이가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은 꽤 즐거웠다. 의주는 그렇게 니콜라스의 말과 생각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꺼풀 벗겨낸 니콜라스는 얼핏 듣기에는 근사한 억양과 달리, 생각보다 꽤 거친 말투를 구사하는 듯했다. 그러나 의주에게 배우는 한국어만은 유달리 느리고 부드러운 것이 의주는 좋았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한국어가 자신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주주, 가?”방금 씻고 나온 의주 앞에 팅팅 부은 얼굴의 니콜라스가 불쑥 나타났다. 새벽형 인간인 니콜라스가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의주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다 말고 물었다.[웬일이야, 깼어?]
“응.”
[더 안 자?]
“나 의주네 학교에 가고 싶어.”
“학교?”응. 니콜라스가 하품을 쩍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주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어차피 거창한 이유는 없을 게 분명했다. 의주네 학교 궁금하니까. 그러잖아도 학교 구경을 시켜준 일이 없다는 것을 떠올린 의주가 니콜라스의 소원을 받아들였다.[그런데 나 수업 들어야 해.]
[같이 가.]
[따라오게?]
[혹시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재미없을걸. 그리고 3시간이나 돼.]
[의주가 듣는 수업 궁금해.]니콜라스는 느직느직 준비를 마쳤다. 보다 못한 의주가 몇 번인가 재촉했지만, 아마 오전 8시 전에 일어나는 것은 니콜라스에게 무리였던 듯했다. 환복만은 빨랐다. 입을 옷을 미리 정해두기라도 한 건지. 브이넥 티셔츠에 얇은 후드집업을 받쳐입고 두꺼운 체크무늬 코듀로이 재킷을 걸쳤다. 바지는 무난한 기조의 블랙 진. 목에는 첫날 하고 있었던 목걸이가 걸려 있다. 신입생 때부터 썼던 스포츠 브랜드 백팩에 노트북과 패드를 쑤셔 넣고 있던 의주가 목을 내민 채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니콜라스를 보고는 조금 얼떨떨한 낯으로 물었다.[너 그러고 가게?]
“응.”니콜라스가 단칼에 대답하며 카메라 가방을 챙겼다.[추울 텐데.]의주의 말에 니콜라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충 맨투맨에 셔츠 입고 패딩으로 무장하려던 의주는 약간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나도 옷을 갈아입어야 할까 봐.]
[왜? 지금도 예쁜데.]
[예뻐?]
[응, 난 주주가 뭘 입든지 좋아. 주주는 핏이 좋으니까 뭘 입어도 다 잘 어울려.]
[저번에 쇼핑하러 갔을 때는 뭐라고 했었잖아. 너무 어색하다고.]
[그건 네 애티튜드고. 그리고 네가 고른 옷들 너무 알록달록해.]
[그럼 전부 어울리는 건 아니잖아.] 의주가 반박하자 줄곧 거울을 보던 니콜라스가 거울 속 의주를 흘겨본다.
[아니라고. 주주는 뭘 입어도 잘 어울린다고.]니콜라스의 말을 곱씹던 의주가 미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我漂亮嗎？ (나 예뻐?)”니콜라스가 웃음을 터뜨리고 의주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是啊，很漂亮。 (응, 예뻐.)” 그러고는 얄밉게 덧붙인다.
[하지만 성조 공부는 좀 더 해야 하겠네요.]의주는 니콜라스의 모국어를 배우는 것 자체도 좋았지만, 중국어를 사용하면 니콜라스가 중국어로 대답해 주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자꾸 중국어로 말을 걸게 된다. 언젠가 의주의 한국말을 모두 기억하고 싶다던 니콜라스처럼, 자꾸 기억하고 싶은 목소리와 억양이었다.의주가 방에서 머플러를 들고 와 니콜라스에게 둘러주자 순식간에 입이 막힌 니콜라스가 웅얼웅얼 항의했다.“주주, 뭐야.”그렇게 소리쳐봤자 광대 다 올라갔구만. 의주가 피식 웃으며 머플러를 꼼꼼히 동여맸다.“天氣很冷。 (날씨가 추워.)”
“我很強。 (난 튼튼해.)”
“知道。 (알아.)”의주가 대꾸하고서는 니콜라스를 돌려세워 거울에 비춰주었다.[그래도 걱정되는걸.]
[주주, 날 걱정해?]
“응.”
[하긴. 크리스마스에도 날 걱정했지. 본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그럼 걱정을 어떻게 안 해.]
[내가 외국인이라서?]
눈이 짧게 마주쳤다. 의주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한다.
[…아마도.]
[친절하네, 의주는.]출발이 다소 늦어지는 바람에 빠른 걸음으로 이동해야 했다. 의주는 주변 건물을 둘러보느라 발걸음이 늦어지는 니콜라스를 붙들고 빠르게 공학관으로 향했다. 유동 인구가 줄어들어 더욱 황폐해 보이는 널따란 캠퍼스의 심장을 두 사람이 나란히 가로지른다. 니콜라스가 주위를 두리번대며 숨을 내쉬자 입김이 쏟아져나온다. 공학관으로 가는 길은 꽤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건물들 사이사이를 익숙하게 헤치고 나가는 의주의 등판이 유난히 믿음직스럽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 대학 동기 같다고, 니콜라스는 잠시 생각했다.2분쯤 지각해 대형 강의실 뒷문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맨 뒷줄에 나란히 앉았다. 본래 의주가 고수하던 자리는 모니터가 조금 더 잘 보이는 오른쪽 분단 중간쯤이긴 했는데, 거기까지 이동하면 정말 광역 어그로를 끌 것 같았다. 그러잖아도 니콜라스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눈에 띄는데. 지각생의 등장에 열댓쯤 되는 시선이 잠시 모였다 흩어졌다. 의주는 자리에 앉아 아이패드를 켰고, 니콜라스는 멀뚱멀뚱 슬라이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부터 걱정이다.수강평 사이트의 강의력 항목에서 5점 만점에 2점을 받은 교수의 입에서 지나치게 전문적인 단어들이 마구 쏟아졌다. 오히려 영어 강의라 니콜라스는 알기 쉬우려나. 의주가 필기하다 말고 옆을 돌아보자 니콜라스와 눈이 마주친다. 계속 이쪽을 보고 있었나? 눈이 마주치니 니콜라스가 낮게 속삭였다.[재미없다.]의주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종이 있어?]
[종이는 왜.]
[심심해서.]의주가 백팩에서 이면지 한 장과 볼펜을 찾아다 전해주자, 니콜라스가 곧장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의주는 다시 집중하려 고개를 돌렸다.아까 전과 뭐가 다른지 알 수 없는 내용을, 그러나 슬라이드는 몇 장 넘긴 채 강의하는 교수를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니콜라스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의주가 옆을 돌아보니 니콜라스가 종이를 슬쩍 밀어 보여준다.교수를 따라 그린 낙서다. 미국 일류 예술대학 재학생답게, 교수의 벗겨진 머리를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한…. 의주가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니콜라스가 종이 귀퉁이에 영어 문장을 휘갈겼다.[닮았지.]의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니콜라스가 흡족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뭔가에 열중한다. 20분쯤 지났을까, 다시 종이가 꾸물꾸물 다가온다.의주가 확인해 보니 그것은…아마도 의주였다. 커다란 눈과 다소 작은 눈동자, 말려들어 간 입꼬리가 약간 과장되게 그려진. 사람이라기보다 아주 귀여운 물고기 같긴 했지만. 위의 교수 그림과는 다르게 모나미 볼펜으로 나름의 명암도 넣었다. 의주가 입을 벌린 채 도플갱어를 감상하다 아이패드에 끄적였다.[나야?]니콜라스가 만족스러운 낯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였다. 의주가 볼을 부풀리더니 다시 끄적였다.[바보 같아.]
[의주 바보잖아.]
[내가 왜 바보야.]
[바보니까.]황당한 표정으로 니콜라스를 째려보자, 혀를 내밀며 응수한다.그 뒤로도 니콜라스는 갖가지 낙서로 의주의 주의를 끄는 듯하다가, 그것도 이내 질린 모양인지 몰래 휴대폰을 하기 시작했다. 릴스를 넘기다 말고 가끔은 의주를 툭툭 치기도 했다. 이거 너 닮았다, 이거 맛있겠다, 한국은 정말 이래? 따위의 명분으로. 종내에는 한글 글씨 연습을 하다가 대놓고 엎드려 자면서 니콜라스는 길고 긴 3시간을 버텨냈다. 머리카락 밑에 깔린 종이에 어설픈 글씨들이 즐비하다. 니콜라스. 변의주. 변의주. 변의주.[니콜라스, 수업 끝났어. 밥 먹자.]수업이 끝나고 의주가 니콜라스를 흔들어 깨웠다. 눈썹 먼저 들썩인 니콜라스가 꾸물대며 몸을 일으켰다.[뭐 먹어?]
[너 먹고 싶은 거.]
[난 아무거나 다 좋은데.]
[넌 항상 다 좋다고 하더라.]
[의주랑 같이하는 건 다 좋아.]그러니까, 이런 말이 헷갈린다고…. 짐을 싸는 의주의 손이 빨라졌다.어차피 저녁까지 시간이 난다는 니콜라스의 말에, 점심은 학식으로 때우기로 했다. 키오스크 결제서부터 니콜라스는 의주의 뒤에서 기웃거리다가 의주의 행동을 따라 했다. 식권 제출, 줄 서기, 식판과 수저 챙기기. 꼭 후배라도 데려온 것 같다. 같은 대학에 다녔으면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이렇게 학식도 먹고, 축제도 같이 보고, 수업도 듣고.[맛이 어때?]치즈돈까스를 맛본 니콜라스의 눈썹이 한 번 들썩였다. 학식이니 평소에 먹던 것보다 맛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더 맛있는 데로 갈 걸 그랬나?]
[응? 아냐. 좋은데, 난.]
[억지로 좋다고 할 필요 없어, 니콜.]
[진짜인데.]니콜라스가 돈까스를 우물거리며 답했다.[주주, 맛없어?]
[난 늘 먹는 거니까.]의주의 대답에 니콜라스가 씹던 걸 멈추고 눈을 굴린다.[오늘도 늘 평소 같아?]의주가 고개를 들어 니콜라스와 눈을 맞췄다. 평소에 그렇게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끔 니콜라스는 눈치채는 게 더 어려울 정도로 투명하게 행동한다. 혹은 의주의 적성이 니콜라스와 가까운 걸지도. 의주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정답을 골라낸다.[아니, 오늘은 특별하지. 니콜라스랑 왔으니까.]

* * *

캠퍼스의 거진 2/3를 돌았다. 평소에는 의주도 잘 오지 않는 문과 캠퍼스를 비롯하여 스포츠 컴플렉스, 학생회관, 본관, 이어지는 각종 단과대 건물과 기념관 등. 보통 다니던 길이 아니라서 의주도 주변 지도를 보고 다녀야 하긴 했지만, 니콜라스는 큰 불평 없이 성실히 따라왔다. 아마 캠퍼스 자체는 니콜라스 쪽이 더 볼 만하긴 할 테지만…. 캠퍼스를 구경시키던 중 민망해진 의주가 그렇게 말하면 니콜라스는 학을 뗐다.[주주네 학교만의 예쁨은 따로 있어. 난 정말 마음에 드는데.]
[예뻐?]
[응, 예뻐.]보통 의주가 상주하는 곳은 공학관과 가장 가까운 과학도서관 건물이었다. 이곳에서 주로 공부한다는 말에 니콜라스가 지대한 관심을 보이자, 의주는 못 이기는 척 은근슬쩍 출입시켜 주었다. 먼저 들어간 의주가 학생증을 다시 태그해 빨리 들어오라며 다급하게 손짓하자, 니콜라스가 후다닥 들어와 시원하게 웃어젖혔다.[사실 이렇게 출입할 수도 있는 건지 처음 알았어.]의주의 고백에 니콜라스가 또 한참을 웃었다. 웃음을 참지 못해서 결국 전화 부스로 대피해야 할 정도였다. 전화 부스는 장정 둘이 들어가기에는 비좁아서, 한 명은 앉고 한 명은 서야 한다. 그마저도 종아리가 딱 붙는다. 전화 부스에 구겨 들어간 의주가 황당한 낯으로 쏘아붙였다.[뭐가 그렇게 웃겨?]
[나를 위해서 새로운 걸 도전했다는 점이.]전화 부스에 앉은 니콜라스가 의주를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의주는 실실 웃고 있는 니콜라스의 낯을 향해 뭐라 쏘아붙이려다 기력을 소진하고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니콜라스가 또 웃으며 무릎으로 의주의 다리를 툭 친다.자료실에서 니콜라스는 괜히 책을 한 권 뽑아서는 서고에 기대 속삭였다. 주주, 나 어때?[어떻긴 뭐가 어때.]
[멋있어 보이지 않아?]
[대체 어디가?]니콜라스가 그러더니 책을 보는 체하며 얼굴을 가렸다가 슬쩍 얼굴을 들어 눈만 드러냈다. 자유분방한 눈썹이 까딱대자, 의주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한다. 의주가 옆 서고로 빠져 대출 중이던 전공서가 반납되었는지 확인하고 있으면, 니콜라스가 쭐레쭐레 다가오더니 뒤에서 또 섹시 주주니 뭐니 하며 염장을 질렀다. 결국 건물에서 금방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안 추워?] 의주가 묻자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하나도.]
[오늘은 어제보다 좀 따뜻하긴 하네.]의주가 니콜라스의 뺨에 손등을 대어보고는 말했다. 니콜라스가 머플러 안으로 턱을 당겨 넣었다.[근데 우리 밥 뭐 먹어.]
“배고파?”
“응.”
[가려고 했던 데는 아직 문 안 열었을 건데…. 뭐라도 먹을래? 여기 카페 있어.]데리고 가려고 했던 캠퍼스 근처 맛집은 아직 브레이크 타임이다. 의주의 제안에 니콜라스가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과학도서관 옆의 산학관 1층에 개인 카페가 하나 있었다.“뭐 먹을래?”니콜라스가 의주의 뒤에 서서 키오스크 화면의 메뉴를 죽 훑는다. 의주가 메뉴를 쭉 넘겨보다가 문득 묻는다.“버블티?”
“아니, 그거 말고….”
“너 버블티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의주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며 묻자 니콜라스가 뭐? 하더니 피식 웃는다.“뭐야, 왜? 저번에는 버블티 먹었잖아.”
“버블티 좋아해. 좋아해.”
“근데 왜.”
“근데, 사랑하지는 않아.”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의주가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하지는 않아?”그게 뭐야? 좋아하는데 사랑하지는 않는 게.[난 딸기 라떼.]니콜라스가 치고 들어와 키오스크 화면을 클릭했다. 딸기 라떼 아이콘이 장바구니에 담기는 모션이 화면에 띄워진다. 화면을 쳐다보던 의주의 낯빛이 점점 굳어졌다. 니콜라스가 의주에게 묻는 소리가 점차 멀어진다.[의주, 안 골라?]정말로, 좋아하는데 사랑하지는 않는 게 대체 뭐야?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이렇게 표현하는 건가? 라이크와 러브의 차이, 뭐 그런 거야? 의주가 뒤를 돌아 니콜라스의 눈을 쳐다본다. 니콜라스의 어리둥절한 눈동자를 확인한 의주가 다시 앞을 본다. 니콜라스의 한국어는 전부 의주가 가르쳤는데.하지만 거대한 공백이 있었다. 아주 큰 공백, 아무리 다리가 긴 의주여도, 아무리 멀리뛰기에 능한 니콜라스여도 결코 뛰어넘지 못하는 공백.니콜라스는 의주를 좋아한다. 의주도 아는 사실이다. 본인이 여러 차례 언급했으니까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 의주도 니콜라스를 좋아하고. 그런데 그게 같은 단어를 쓴다고 해서 동일한 감정인가? 크리스마스에 꿔바로우든 피자든 뭐든 다 좋다고 했던 니콜라스를 떠올린다. 의주는 문득 그 길고 긴 니콜라스의 ‘라이크 리스트’ 맨 끝에 자신을 추가하게 되는 것이다.좋아하는데 사랑하지는 않는, 그 애매한 구간에 변의주가 있다.

* * *

니콜라스와의 추억은 많지만, 그렇다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하지는 않다. 의주는 휴대폰 갤러리를 쭉쭉 넘겨 간혹 몇 장 끼어 있는 니콜라스와의 사진을 확인한다. 대부분 의주가 직접 찍은 사진이라서, 니콜라스가 가끔 찍어줬던 사진과 달리 상태가 안 좋았다. 기억은 먼지 낀 렌즈 때문에 희끄무레한 그 사진들처럼 희미해질 것이다.캠퍼스 투어 이후, 실제로 갑자기 들이닥친 과제와 도저히 경시할 수 없는 기말고사의 콤보로 인해 니콜라스가 날짜를 늦춘 것이 무색하게도 같이 있는 시간이 확 줄어들었다. 어쩌다 같이 있을 때도 전과는 조금 달랐다. 의주가 단념 아닌 단념을 하면서 관계가 약간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만난 지 5~6주쯤 되니 대화가 계속 화수분처럼 나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대화는 자꾸 미묘한 구석에서 끊겼다. 그렇게 니콜라스의 출국일이 다가왔다.의주는 B의 쏘나타로 니콜라스를 바래다주었다.[안 춥겠어?] 의주는 으레 하는 질문을 또 던진다.오랜만에 대만으로 돌아가는 니콜라스는 또 잔뜩 힘을 줬다.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새로 구입한 젠틀 몬스터 선글라스에 유명 브랜드 맨투맨, 얼룩덜룩한 무늬의 쨍한 바지, 위에 패딩을 덧입었다.[따뜻해 보이지 않아?] 니콜라스가 대꾸한다.의주도 오늘은 평소와 조금 다른 모습이다. 일전에 니콜라스와 함께 나갔던 쇼핑에서, 니콜라스가 골라줬던 티셔츠에 청바지. 티셔츠에 청바지라고 하니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티셔츠에는 등판에 무려 기하학적인 거대한 자수가 들어가 있고 청바지는 여덟 군데쯤 찢어진 아주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니콜라스의 것과 색깔만 다른 비니. 전부 니콜라스와 함께 쇼핑몰에 갔을 때 구매한 것들이다.
의주가 한두 번 니콜라스더러 패션 센스를 칭찬했더니, 니콜라스는 몇 번인가 쇼핑에 의주를 데리고 나갔다. 거의 대여섯 시간씩 이어지는 대장정이었으므로 나중에는 의주가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물론 힘들어서 그렇지, 재미가 없지는 않았다. 니콜라스는 정말 성심성의껏 의주의 옷을 골라주었고, 의주에게 여러 옷을 피팅해보며 궁극의 핏을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항상 의주에게 활짝 웃으며 칭찬해 주었다.[주주, 진짜 잘 어울려.]아예 처음 시도해 보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니콜라스가 그렇게 칭찬하면 왠지…정말 그런 것도 같아 의주는 그렇게 옷을 구매해 버리고 만다. 덕분에 평소보다 옷값이 배로 나갔다. 니콜라스가 좋은 브랜드의 옷을 고집하기도 하고. 비니는 니콜라스가 꼭 자신이 사겠다며 꼬장을 부려 선물 받은 것이다. 그렇게 튜닝된 의주는 니콜라스의 분신 같아 보인다.짐가방이 한두 개 정도 더 생긴 것 같다. 두 사람은 아침부터 트렁크로 짐을 열심히 나른 뒤 공항으로 이동했다. 뉴스 대신 니콜라스의 휴대폰에 저장된 플레이리스트가 흘러나온다. 어디서 들었던 노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의주에게도 어느 정도 익숙한 노래다. 니콜라스는 창밖만 마냥 바라보고 있다.공항에 도착해 수하물을 맡긴 이후 비행기 시간까지 의주와 니콜라스가 나란히 앉아 기다린다. 니콜라스는 도중에 휴대폰을 봤다가 껐다가 부산스럽게 굴었다. 의주는 왠지 모르게, 가족이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따 오후에는 B가 들어올 텐데도. 의주가 공항 천장을 멀겋게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연락하고 싶으면 어떡해?]
[어제 이메일 가르쳐줬잖아.]
[가끔은 말로 하고 싶은 것도 있잖아.]
[그럴 때는….]니콜라스가 입을 뗐다가 다시 다물었다.정적이 흐른다. 두 사람 주위로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지나간다.[그러면 스카이프도 괜찮고.]
[내가 미국으로 가면….]의주가 충동적으로 물었다.[그러면 네가 가이드 해줄 거야?]
[당연하지.]니콜라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의주의 어깨를 툭 쳤다.[약속했잖아.]
[정말?]
[정말.]의주가 니콜라스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니콜라스가 선글라스를 위로 추켜올리며 자세를 똑바로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이내 옆을 돌아보며 성마른 투로 말한다.[근데 정말로 미국에 올 생각 없잖아, 너.]
의주가 입을 다물었다. 니콜라스도 덩달아 입을 다물더니 작게 사과했다. 미안. 의주가 반응하기도 전에 탑승구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던 승무원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방송했다.[탑승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13시 10분에 타이베이로 가는, A 항공 367편은 지금 8번 탑승구에서 탑승을 시작합니다. 탑승 마감 시간은 출발 5분 전입니다.]
사람들이 탑승구 앞쪽으로 몰려든다. 다리를 벌린 채 앉은 니콜라스가 허리를 수그린 채 탑승객들 쪽을 쳐다본다. 의주는 여전히 니콜라스를 바라보고 있다.[…왜 그렇게 생각했어?]
[넌 거짓말을 잘 못하니까. 티가 나.] 니콜라스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대답했다.
[지금도?]니콜라스가 도로 고개를 돌려 의주를 쳐다본다.[지금도 내가 미국에 안 갈 것 같아?]
[응.]
[…그렇구나.]니콜라스가 다시 탑승구를 쳐다본다. 의주는 꽤 자라난 니콜라스의 뒷머리를 본다. 예전에 무슨 FBI 수사관인가 하는 사람이 썼던 책에서, 왜, 사람이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으면 자꾸 다리가 출구 쪽으로 향한다고 했던 게 갑자기 생각난다.[난 너랑 지내면서 즐거웠어.]
[나도.]
[정말 좋았어. 네 덕분에 다양한 경험도 가능했고.]
[영어가 늘었지?]고개를 돌린 니콜라스의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의주가 못내 웃는다.[응. 그리고 넌 한국어 할 수 있게 됐잖아.]
[맞아, 의주 덕분에 이제 4개 국어야.]
[네가 똑똑해서 그래.]
[아니야, 정말. 의주는 가르치는 재능이 있어.]
[…고마워.]승무원이 다시 한번 안내방송을 했다. 탑승구 앞에 선 줄이 어느덧 반토막이 났다. 의주는 코를 훌쩍이고는 패딩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무난한 우체국 규격 봉투, 입구를 딱풀로 봉했다. 겉면에 의주와 니콜라스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다. 니콜라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봉투를 받아 들었다.[이게 뭐야?]
[하고 싶던 말을 정리했어. 다 못하고 갈까 봐…. 이따 비행기에서 읽어봐.]
[의주, 고마워.]니콜라스가 팔을 벌리자, 의주가 니콜라스를 마주 안았다. 니콜라스의 품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의주가 다시 한번 코를 훌쩍이며 팔을 거뒀다. 비염이 심해졌나.[이제 가야 할 것 같은데.]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들어 말했다. [메일 할게.]
[응. 다음에 또 봤으면 좋겠다.]
[B한테 안부 전해줘.]마지막 순번으로 여권을 확인하고 들어간 니콜라스가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의주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돌연 충동적으로 소리쳤다.“니콜!”니콜라스가 그 말에 웃으며 다시 손을 흔든다. 의주도 결국 손을 흔들었다.의주는 그렇게 니콜라스를 떠나보냈다.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본인도 모르는 채로.

* * *

새로운 학기의 시작이다. B에게 듣기로는 니콜라스도 긴 휴학을 끝내고 대학 생활을 재개했다고 한다.“그런데 요즘은 사진 대신 영상 쪽을 공부하고 싶대.”
“왜요?”
“그건 안 물어봐서 잘 모르겠는데.”작별 때 했던 말이 무색하게, 아직 두 사람 사이에는 딱히 이렇다 할 메일이 오가지는 않았다. 니콜라스 대신 B와 다시 부대끼며 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이번 학기, 의주의 시간표는 유독 괴랄했다. 동기들은 의주의 시간표를 바둑판이라고 칭했고, 의주를 사칭하여 망한 시간표 대회에 나가 수상까지 했다. 그런 시간표를 갖게 된 이유는 졸업을 위해 결단코 포기할 수 없는 실험과 전공 필수, 그리고 딱히 연관 없는 교양 수업에 대한 고집 때문이었다. 오빠, 미쳤어요? 3학년이 왜 교양을 두 개나 들어요. 사진의 철학적 이해랑 중국어 회화 연습? 이건 뭐야. 후배의 강력한 일침에도 의주는 굳건했다. 급기야는 과 내에서 중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시간표가 빚어낸 애로사항으로 인해 애매하게 남는 공강에는 교육대학원 진학을 알아보고 있다. 최근 교직에 부쩍 관심이 생겨서.니콜라스의 빈자리는 빠르게 메워졌다. 얼마 전에는 난생처음 소개팅에 나가기도 했는데, 둘 다 좀 많이 바빠서 점차 연락이 느슨해졌다. 사실 둘 다 그만큼 간절하지는 않았던 거겠지만. 돌이켜보면 의주도 니콜라스를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6주라는 타임 리미트에도 불구하고, 간만 끊임없이 보다가 혼자 나가떨어졌으니까. 정말 사랑했다면, 진작에 고백하고 밀고 나가서 뭐…. 미국에서 살든 하지 않았을까. 정말 사랑했다면.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니까, 그럭저럭 괜찮은 친구 관계로 지내다가 떠나보냈던 거겠지. 한국을 떠나고 싶지도 않았고, 니콜라스 말마따나. 그냥 니콜라스도 떠나보내는 인연인 거겠지. 하긴 대만 출신에 학교는 미국에서 다니는 예술가 동갑내기라니, 나이만 빼고 성격, 전공 분야, 관심사, 성장 배경까지 모든 부분이 다른데. 둘이 뭘 할 수 있겠어, 영화도 아닌데.영화도 아닌데…. 그렇지만 <흐르는 강물처럼>은 가끔 찾아보게 된다. B도 알아볼 정도였다. 또 그거야? 난 재미없던데, 그거. 의주도 이 영화가 무척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예술은 그것을 처음 본 때로 사람을 끌고 가게 하는 힘이 있으니까. 어느덧 캠퍼스에 벚꽃이 만발하는 때지만, 이 영화를 재생하면 작년 크리스마스가 금세 떠오른다. 어쨌든 <이터널 선샤인>을 보느니 <흐르는 강물처럼>이 낫다.외모 정도를 제하면 평범한 대학생인 변의주는 여전히 과학도서관에서 썩어가고, 목표는 생겼지만 고민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으며, 삶은 더욱 각박해졌다. 극강의 무난함을 추구하던 옷차림이 다소 어떤 경향성을 띠게 되긴 했지만, 거울 속 의주는 딱히 변한 게 없다. 지난겨울 전이든, 후든.사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건가.솔직해지자. 의주는 여전히 니콜라스를 생각한다. 몸은 여전히 같은 루틴을 반복할지언정, 정신은 니콜라스에게 종속되었다. 니콜라스의 유령이 의주의 생활을 잠식했다. 니콜라스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아주 잘게 쪼개져 의주의 일상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의주가 꾸는 꿈, 의주가 듣는 수업, 의주가 보는 것과 듣는 것과 먹는 것. 의주는 종종 산학관 1층 카페에서 딸기 라떼를 시킨다. 한 시간 후면 다시 아메리카노를 사러 와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학생 식당에서 치즈돈까스를 보면 니콜라스의 생각이 나고, 옷장에 박혀 있는 휘황찬란한 유명 브랜드의 옷을 보면 현관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니콜라스를 상상하고, 노트 사이에 끼워놓은 A4 용지 위 니콜라스의 낙서를 보면 엎드린 채 제 옆구리를 찌르던 니콜라스의 기억이 밀려온다. 조금 버거울 정도로.시간 낭비는 그만해야 할 것 같아서.하지만 너와 함께하느라 흘러간 시간보다 떠나간 널 떠올리느라 낭비된 나의 시간이 훨씬 더 큰 것 같으면 어쩌지.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고, 뒤늦은 의주의 물음에 친절히 답해줄 사람은 없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한 지 6주쯤 지나서였다. B는 아침 일찍 운동을 나갔고, 의주는 적막한 집에서 깨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1교시부터 수업이 있었다.시간이 조금 남아 준비된 상태로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문득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잠금을 열어보니 메일이 하나 와 있었다. 하루에도 스팸 메일이 수십 개씩 오는 학교 계정 메일이 아니라, 개인 메일. 발신자 메일은 듣자마자 외웠던 익숙한 그 주소다. 심장이 갑자기 너무 빠르게 뛴다. 심장이 펄떡이고 혈관이 꿀렁이는 감각이 선명하다. 한참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던 의주가 어렵게 화면을 내려 메일 내용을 확인했다.

의주가 버튼을 클릭하자, 자동으로 드라이브 앱이 열려 공유 폴더 한 개가 등장했다. 폴더 이름은 [photos]. 폴더를 누르자 수백 장의 사진이 로드되기 시작한다. 죄다 고화질이라 그런지 저장 용량이 엄청나게 크고 로딩 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느렸다. 의주가 침대에 걸터앉아 로딩되는 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지각을 면하기 위한 가장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다린 후에야 겨우 사진을 대충 둘러볼 수 있었다.피사체 대부분이 의주였다. 모르는 사이 찍은 사진도 있었고, 어설프게나마 포즈를 취한 사진도 있었다. 풍경은 죄다 의주와 함께 갔던 익숙한 장소들. 아직도 의주의 방에 붙은 12월 30일에 찍은 의주의 사진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12월 말부터 2월 초까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촬영된 사진들. 의주가 사진 한 장 한 장을 넘겨본다. 각 장이 어떤 날 찍혔는지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사진에서는 오롯이 의주만이 보였다. 사진을 찍은 이가 어떤 의도로 의주를 찍었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니콜라스의 모든 사진에서, 니콜라스가 의주를 보며 내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좋아하는데 사랑하지는 않아. 니콜라스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의주의 눈 안쪽이 뜨거워져 온다.…….…시간을 두고 보면 보이는 것이 있다.
니콜라스의 사소한 어휘 선택 하나하나에 휘둘리고, 마음을 끊임없이 재고 평가하고 숨기려던,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은 이렇게 상대와 한참 멀어지고 나서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순간에 깨닫게 된다. 의주를 보는 니콜라스의 시선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그리고 사랑스러웠는지, 그런 것들은 아주 늦게서야 알게 된다. 꼭 말이 아니어도 가능한 고백이 있음을,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진득이 눌어붙어 아직도 의주를 쥐락펴락하는 감정이 있음을. 언어가 전무한, 시공간을 넘어 돌아온 고백에 의주는 늦게나마 인정한다. 니콜라스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용기가 없어서 모른 척했는데, 아마 니콜라스를 사랑하는 것 같다.니콜라스를 위해 시간과 노력과 감정을 낭비하고 싶다.폴더의 가장 끝에는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한 동영상 파일이 하나 있었다. 클릭하면 크림색 베이스를 쥐고 집중한 낯으로 연주하는 의주의 모습이 나온다.

* * *

[아니, 오늘은 특별하지. 니콜라스랑 왔으니까.]그 말에 니콜라스가 입술을 말고 시선을 내렸다. 부끄러워하나. 정작 말을 한 당사자인 의주는 영어로 한 겹 포장해 그런지 평온했다.[갑자기?]
[실제로 그래.]
[응….]
[다 먹으면 학교 구경시켜 줄게.]
[주주, 안 바빠?]
[저녁까지 같이 놀기로 했잖아.]
[슬슬 기말고사 준비해야 한다며.]
[아직 좀 남았어. 아, 그리고 그 전에 잠깐 들러야 할 데가 있어.]
[어딘데?]밥을 먹고 들른 곳은 의주가 소속된 공과대학 밴드부 동방이었다. 다행히 동방은 지옥의 오르막길이 있는 공학관이 아닌, 그 직전의 이학관 지하에 있었다. 방학인 데다 합주일도 아니라서 동방은 직접 문을 따고 들어가야 했다. 의주가 불을 켜며 설명했다.[예전에 썼던 실험 리포트가 필요한데, 여기 두고 왔나 싶어서.]니콜라스가 쭈뼛대며 들어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동방은 한쪽 벽에 거울이 붙었고, 나머지 벽은 전부 방음 처리되어 있었다. 가운데 거대한 드럼을 중심으로 키보드와 마이크, 기타 여러 대가 서 있고, 그 사이의 어지럽게 널린 전선들은 양쪽의 앰프에 꽂혀 있다. 몇 개 선 보면대에 죄다 악보들이 쌓여 있고, 구석에는 동아리원들이 두고 간 잡동사니들이 책장에 아무렇게나 들어 있었다. 의주가 책장을 뒤지자 니콜라스도 따라가 주위를 기웃거렸다. 책장 옆면에는 공연 실황 사진이나 연습 중에 함께 찍은 셀카도 인화되어 붙여져 있었다. 니콜라스는 자연스럽게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의주는 항상 사진 구석에서 모습을 보였는데, 찍어낸 듯이 어색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생김새 탓인지 사진에서 항상 기묘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주주, 베이시스트야?]
[베이스를 연주하긴 하지. 근데 원래 베이스는 아니었고, 기타로 들어왔는데….]책장을 뒤지느라 의주의 말끝이 흐려진다.[근데?]
[근데 들어와 보니까 기타가 많아서 베이스로 빠졌어.]
[멋지다.]
[아직 한참 멀었어. 니콜은 악기 다루는 거 있어?]
[기타랑 키보드.]
[네가 나보다 나은데?]
[아냐. 주주, 연주해 주면 안 돼?]니콜라스의 요청에 의주가 멈칫했다.[근데 나….]
[궁금한데 한 번만. 안 놀릴게.]
[그렇게 못하진 않거든?]
[그럼 보여주면 되지. 쫄았어?]
[…조금만이야.]응! 니콜라스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의주가 헛웃음과 함께 베이스를 꺼내 들었다. 크림색 베이스, 각인된 이니셜은 남의 것인 걸 보니 의주가 혼자 쓰는 악기는 아닌 듯하다. 의주가 의자에 앉아 익숙하게 선을 연결하고 앱을 켜 튜닝을 시작한다.[잠시만.]니콜라스가 접이식 의자를 가져와 그 앞에 앉았다. 집중하느라 머리꼭지가 보이는 의주의 비스듬한 옆얼굴. 반쯤 내리깐 눈과 동그란 볼이 눈에 띈다. 니콜라스는 턱을 괸 채 의주를 빤히 쳐다본다. 틱틱대는 튜닝 소리 끝에 의주가 휴대폰을 켜서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재생한다.[이건 예전 베이스 치던 선배가 연습하라고 해서 한 건데.]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에어로플레인. 이걸로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처음 알았다. 기타를 칠 기회가 적을 것이라는 말에 동아리를 탈퇴하는 대신 기타에서 베이스로 전향한 의주가 매우 기특하다며 끼고 다니던 선배가 점점 스파르타식이 되어가더니 끝에 던져준 곡이었다. 혼자 마스터해 봐. 이것만 칠 수 있으면 넌 이제 완벽한 베이스다. 막상 유튜브 봐가며 겨우겨우 마스터하고 선배한테 들려줬더니, 진짜 마스터해 왔네? 하고 신기해했지만. 의주는 곡을 설명하다 말고 음악에 맞춰 베이스를 퉁기기 시작한다. 퍽 진지한 낯과 상반되는 경쾌한 연주가 시작된다.2분 남짓한 시간 동안 후렴까지 연주한 의주가 머쓱한 표정으로 음악을 껐다. 니콜라스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아 분위기가 대단히 어색했다. 의주가 코를 긁적이며 베이스를 정리하려 하자, 우두커니 앉아 의주를 빤히 바라보던 니콜라스가 갑자기 의주의 어깨를 잡아챘다.[의주, 너 베이스 천재인 것 같아.]“뭐?” 의주가 얼떨떨하게 내뱉어놓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니콜라스의 표정이 진짜 무슨 영재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어서. 니콜라스는 상기된 표정으로 의주의 어깨를 흔들어댔다.[이렇게 잘 치는 사람 진짜 처음 봐. 밴드 공연 몇 번 보긴 했는데, 베이스가 이렇게 멋있는 건지 몰랐어. 의주, 너 진짜…. 너 진짜 못하는 게 없다.]니콜라스가 속사포로 마구 칭찬하더니 와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의자에 앉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힘찬 박수 소리에 의주는 삽시간에 벌게진 얼굴로 니콜라스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그만해….]갑자기 잡아 온 손 탓인지 니콜라스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덩달아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서는 손을 휙 뺐다. 시선이 엇갈리고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의주는 뺨을 긁적이다 입을 뗐다.[너도 베이스 잘 칠 것 같은데. 손이 크잖아.]의주의 말에 니콜라스가 눈을 굴려 본인의 손을 내려다본다. 의주도 덩달아 니콜라스의 손을 쳐다본다.[…그런가?]
[응.]대 볼래? 의주가 먼저 손을 쫙 펼쳐 내밀자, 니콜라스가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맞춘다. 키에 비해 작은 편인 의주의 손과 그냥 객관적으로 큰 니콜라스의 손이 마주친다. 확실히 니콜라스의 손이 훨씬 더 컸다. 의주가 본인의 손가락 위로 삐죽이 튀어나온 니콜라스의 두꺼운 손가락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니콜라스가 손을 슬그머니 내린다.[못생겼지.]
[아니, 전혀. 못생긴 데가 어디 있다고. 베이스 한번 쳐 볼래?]의주가 개의치 않게 대꾸하며 베이스를 건네자 니콜라스가 못내 제안을 수락한다. 의주가 앉았던 자리에 니콜라스가 앉고, 의주는 그 뒤에 선다. 니콜라스가 약간 불안한 낯으로 의주를 뒤돌아보자, 의주가 니콜라스의 머리를 잡아 앞으로 돌린다. 앞을 봐야지.[기타처럼 잡으면 돼. 여기 잡아봐. 이게 C 마이너 세븐인데.] 의주가 가리킨 현을 니콜라스가 힘주어 잡는다. 손이 워낙 커서 그런지 의주가 처음 베이스를 잡았을 때보다 훨씬 수월해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악기가 영 부담스러운지 니콜라스는 꽤 당황한 기색이다.[어렵다, 생각보다.]
[금방 해. 너도 기타 칠 줄 안다며. 그리고 여기 잡고.]의주가 몸을 기울이고 니콜라스의 손 위에 손을 올려 니콜라스의 자세를 확인한다. 의주의 머리카락과 제 머리카락이 얽히자 니콜라스가 괜히 코를 훌쩍인다.[응. 된 것 같다. 튕길 때는 이렇게.]의주의 시늉에 맞춰 니콜라스가 현을 튕기자 미묘한 소리가 난다. 오! 볼품없는 소리에도 의주가 허리를 세워 니콜라스를 격려한다.[괜찮은데? 나 처음 했을 때보다 훨씬 잘해.]
[의주는 항상 칭찬만 해주니까….]니콜라스가 질린 낯으로 대꾸했다.[칭찬할 만하니까 칭찬하는 거지.]
[아니야.]
[뭐가 아니야.]
[베이스 어렵다.]
[별로야?]의주가 고개를 숙여 니콜라스와 눈을 맞추자, 니콜라스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린다. 아니, 그건 아닌데….[그냥 네가 한 번 더 연주해 주면 안 돼?]
[방금 친 게 최고로 멋있는 거였는데.]
[한 번 더 쳐줘.]
[왜? 이미 한 번 들었잖아.]
[연주하는 의주를 찍고 싶어.]새빨개진 귀 끝으로 니콜라스가 눈을 맞췄다.

* * *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시간의 죽음이라고 설명했다.사진 전공을 하겠답시고 들어온 신입생들은 모두 사진의 역사와 철학적 이해에 관한 강의를 듣게 되는데, 거기서 대충 그런 것들을 배운다. 니콜라스는 이론적인 것에는 영 흥미가 없긴 했지만, 표면적으로나마 그것에 동의하곤 했다. 나는 왜 사진이 좋을까? 생각해보면 항상 그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양으로 박제할 수 있으니까. 사진은 현재적이고, 권력적이고, 또 박제적이고….물론 항상 원하는 그림의 사진이 나오는 건 아니고, 이 밖에도 이런저런 문제가 있지만, 뭐 설명하자면 그런 식인 것이다. 그래서 니콜라스는 사진을 좋아했고, 같은 이유로 흥미를 잃었다. 이제 더는 명확한 그림을 원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좋은 풍경을 봐도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아. 드넓은 대자연이 온 시야를 메우는 미국의 광활한 경관에는 이제 질렸다.한국은…한국은 좀 다른 듯하다. 우선은 의주가 있고. 의주는 이를테면 전형적인 착한 모범생의 느낌이다. 정규 학기도 아니면서, 계절학기 시험을 위해 꼬박꼬박 도서관에 가는 것부터가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만은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있다. 이튿날부터 니콜라스의 아침을 직접 챙겨주기까지 했으면서, 정작 30분도 안 되어 니콜라스를 홀로 내버려 두고 나가버린 것부터가 그랬다. 아침을 챙기길래 식사까지는 같이하겠거니 싶어 캐럴까지 틀어놨더니. 물론 갈비탕은 맛있었고 니콜라스는 비비고 갈비탕의 빅 팬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고작 30분 밖에 있었다고 요란법석을 떨었다.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친밀하게 구는 것도 아니고. 니콜라스는 의주의 선이 참 어려웠지만, 확실히 전자보다는 후자가 좋았다. 의주가 좋으니까. 얼굴도, 성격도.사실 크리스마스 당일 밖에 30분이나 서 있었던 것도 자의에 가까웠다. B에게 갑자기 일이 생겨 니콜라스가 딱히 오갈 데 없이 기다려야 할 상황이 되자, 니콜라스는 먼저 귀가해서 근처 놀이터에서 시간을 때웠다. 그냥 그네 한번 타보고 싶어서. 그러다가 의주가 오는 것을 봤고, 뭔가 창피해서 먼저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그래도 집 안에서 어색하게 마주치는 것보다야 낫겠다 싶어 현관문 앞에서 의주를 기다렸다. 그랬는데 그렇게 반응한 것이다. 사실 짧은 여섯 자리 비밀번호쯤은 단번에 외웠는데.이후로도 의주는 니콜라스가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들을 자주 보여주었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 것부터 해서, 30일 새벽 함께 출사를 나간 것, 이후 대부분의 자유시간을 니콜라스에게 흔쾌히 할애한 것. 그리고 그때마다 미묘하게 긴장한 태도와 당황스러울 정도로 다정한 말들, 나를 좋아하냐고 장난으로 묻기라도 하면 바싹 굳는 모습.나를 좋아하나.수많은 신호가 그 결론을 가리켰지만, 반박 근거도 많았다. 시험 기간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질리도록 먹어 치웠던 딸기 라떼는 기억도 못하고 이전에 한 번 언급하고 말았던 버블티만 알았다. 어쩌다 진심이 반쯤 들어간 말들을 던지면 이해를 못 했고, 니콜라스에게 별 기대도 없어 보였고, 함께 하고 싶은 것이나 가고 싶은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니콜라스에게 뭘 제안한 일이 없었다. 어차피 곧 갈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뻔히 눈에 보였다.그리고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반박 논리. 내가 의주를 너무 좋아하니까 그렇게 착각하고 싶은 것이 아니냐는 자문에 니콜라스는 아무 대답도 내놓을 수 없다. 실제로 의주는 니콜라스가 좋아하지 않고서야 못 배기는 수준의 인물이었다. 비교적 예민한 편인 니콜라스를 딱 맞춰주지는 못했지만, 의주는 가끔 존나 큰 홈런을 쳤다. 형국을 뒤집어버리는 신의 한 수처럼, 니콜라스를 정확히 공략하는 포인트를 기가 막히게 찾았다. 이전에도 니콜라스와 마음이 그럭저럭 잘 맞던 사람은 많았지만, 이 정도로 단기간에 니콜라스를 파괴적으로 함락시킨 건 의주가 유일했다. 그러한 변의주가 본 지 몇 주 만에 나를 좋아한다는 건 사실 망상에 가깝지. 전 애인도 여자인 것 같던데. 니콜라스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놓고도, 막상 의주의 띨빵한 얼굴을 보면 장난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미루고 미뤄놓은 관계의 종말을 고하기 싫어서, 니콜라스는 결국 어거지로 관계를 기어이 연장했다. 의주는 예상대로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나, 가지 말까?]의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거 진심인데. 다시 한번 니콜라스의 행복 회로가 무참히 부서졌다. 그 뒤로는 그냥 마음을 접었다고 해야 하나. 좋아하니 사랑하니, 그따위 감정들은 죄다 뭉뚱그려 구석에 접어놨다. 남은 건 그냥…남는 시간을 의주와 적당히 잘 보내는 것. 그래서 일부러 한국어 공부도 더 열심히 했고, 의주를 데리고 외출도 자주 했다. 그럼 의주는 심심할 때마다 홈런을 쳤고, 니콜라스는 또 좀 힘들어졌다.하지만 그래도, 뭐. 이것도 한두 번이지 나중에는 적응되는 것 같기도 했다. 더군다나 얻어간 것도 있었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사라진 영감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타개책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곧 존재 그 자체로 해결의 주체가 되어 주었다. 의주를 보고 있으면, 뭔가 그림이 생각난다고 해야 하나. 좀 구리긴 한데, 표현하자면 뮤즈 정도가 맞겠다. 기습적으로 찍은 의주의 사진을 니콜라스는 매일 아침 쳐다봤다. 한 번도 모델을 서본 적이 없는 얼굴의 웃기 직전 어색한 표정. 니콜라스가 현재 좋아해 마지않는 바로 그 인물과 좋았던 때를 한순간 박제해 놓은 사진.문득 니콜라스는 마지막 학기에 들었던 필름 수업에 대해 생각했다. 정말 지지리도 안 맞아서 진지하게 드랍해버릴까 생각했던 그 수업. 하지만 생각해보면, 의주에게 써먹은 것들은 그때 배웠던 것이었다. <흐르는 강물처럼>부터 시작해서. …지금 내가 보는 모든 의주를 기억하고 싶은데. 눈과 귀로는 한참 부족하고, 더군다나 지금은 의주가 내뱉는 한국어의 9할은 이해하지 못하니까. 의주가 당장 공부하고 있는 것도 알고 싶은데. 사진으로는 의주를 전부 박제하지 못하니까….의주가 동아리 합주를 하러 떠난 마지막 주말에, 니콜라스는 방에서 넷플릭스로 <흐르는 강물처럼>을 다시 재생해 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영상에 완전히 홀렸던 영화인데, 정작 다시 보니 의주만 생각난다. 니콜라스를 계속 힐끗거렸던 의주. 니콜라스가 손톱을 맞부딪히며 화면을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켜 휴대폰 갤러리에 저장된 의주의 베이스 연주 영상을 본다. 난방이 돌아가지 않아 서늘한 동방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빨간 손끝으로 베이스를 연주하는 의주를 본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에어로플레인. 이것으로 인해 니콜라스의 플레이리스트가 전부 90년대 펑크 록으로 도배되었다는 걸 의주는 알까. 아마 죽어도 모를걸. 니콜라스가 자조했다. 영상 속 숨죽인 본인의 웃음소리, 웅 하는 기계 소리와 스마트폰의 조악한 음향을 들으며 침대에 웅크린 니콜라스는 문득 생각한다. 필름 연출을 공부해 볼까.
그럼 다시 의주 같은 사람이 인생에 다시 나타나면, 그때야말로 온전히 객체로 남겨둘 수 있지 않을까….

* * *

끝에는 의주에게 본의 아니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탑승구에서 의주가 한 번 더 자신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니콜라스는 손을 흔들고 말았다. 정말 필요하다면 달려오든가, 적어도 더 가까이 와서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6주간 질척댔지만 끝은 산뜻해야지.그렇게 생각한 사람치고는 다소 참을성 없게도 니콜라스는 비행기에 올라타자마자 편지봉투를 뜯어보았다. 물론 함부로 뜯지 않으려고 매우 노력해서. 4등분으로 반듯이 접힌 A4 용지를 펴본 니콜라스는 조금 놀랐다. 의주의 성격상 한국어는 아닐 테고 영어로 쓰여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편지는 중국어로 쓰여 있었다. 번역기 돌린 것처럼 어색한 부분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의주의 편지는 ‘니콜에게’라는 말로 시작했다. 첫인사는 다음과 같다.네가 떠날 때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할 것 같아서, 미리 편지를 쓰기로 했어. 중국어가 미숙하지만, 너라면 잘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네가 기뻐했으면 좋겠다.이후로 쓰인 말들을 니콜라스는 제대로 해석할 수 없었다. 피상적으로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지만, 모국어로 번역된 의주의 단어들은 훨씬 다정하고 정직한 데다 진실하게 느껴져서 어려웠다. 의주는 니콜라스 자신이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잘 집어내어 과장되지 않게 칭찬하고, 별것 아닌 장점을 포착해 부각한다. 그리고 니콜라스가 의주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조금은 무심한 의주는 잊어버리리라 생각했던 기억까지 끄집어낸다. 가장 마지막에는 꾹꾹 눌러쓴 이름이 있었다. 주주가.다시 한번 존나 큰 홈런이었다. 홈런만 열 번쯤 맞아준 것 같다. 절대 이길 수 없는 극강의 4번 타자 변의주. 마운드에 홀로 선 니콜라스는 자신이 힘껏 던진 공이 담장 바깥으로 멀리 궤적을 그리는 것을 허망하게 볼 수밖에 없다. 니콜라스의 목적지에는 의주가 없는데, 의주가 이토록 다정하다는 것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그래서 이건 니콜라스의 원망이다. 쓸데없이 다정해서 사람 마음 쑤셔놓는 게 취미인 양 구는 의주에게 던지는 왕이샹 최후의 발악. 잊으려고 노력했는데 네가 진짜 너무 열받아서 견딜 수가 없으니, 너도 한번 당해봐라 식의. 니콜라스는 드라이브 폴더를 노려본다.다시 학교로 복귀한 이후, 니콜라스는 사진을 정리해야 했다. 일단 노트북 용량이 너무 모자랐고, 이번 학기부터 다른 전공 수업을 듣기 때문에 파일 정리가 절실했다. 그중 대부분이 의주였다. 의주의 사진을 다시 마주할 수 있을 때까지 꽤 오래 걸렸다. 생각보다 내상이 너무 심했다. 파일을 싹 다 정리해 백업한 폴더를 의주에게 보내자고 결심한 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원래는 너무…쪽팔려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는데, 편지로 속을 전부 뒤집어놓은 의주를 생각하면 폭탄을 던져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피사체(혹은 뮤즈)에게 본인 사진 주는 게 뭐 어때서. 하지만 정작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면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 포기하고. 그걸 몇 주씩 반복하다가, 과제로 밤샘한 어느 날 잠결이라는 핑계로 전송을 냅다 눌러버렸다.그렇게 전송 버튼은 클릭 되었고, 메일의 형태를 가장한 최후통첩이 변의주에게로 발송되었다. 다음 행동은 의주의 몫이다. 이것이 왕이샹이 변의주에게 부여하는 마지막 기회이자 질문이다. 마치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서 미국까지 아주 길게 이어진 끈 전화처럼 아슬아슬한 관계를 변의주는 어떻게 할 것인가.물론 니콜라스가 바라는 답은 명확하다. 질척거려주기를 바란다. 지난겨울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네가 없으니 재미가 없고, 당장이라도 보고 싶으니 미국에 가겠다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작별할 때 공항에서 남겼던 것처럼 알맹이 없는 말일지라도. 괜히 떠나는 사람 뒤에다 대고 소리치던 미지근한 미련처럼.니콜라스는 메일을 보낸 이후부터 초조하게 메일함을 들락거렸다. 뭐든 반응이 오길 바랐다. 원대했던 니콜라스의 바람은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다정한 의주는 본인의 불량한 의중을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안부 인사 정도는 남겨주지 않을까. 답장은 오래도록 없었다. 조바심에 미쳐버린 니콜라스는 급기야 상대방의 메일 수신을 확인하는 확장 프로그램까지 깔았다. 오전 여덟 시쯤 보낸 메일은 이미 네 시간 전에 확인된 상태였다. 니콜라스는 암울하게 공유 폴더를 클릭해 의주의 사진들을 훑어본다.네가 내 사진들이 대범하고 직관적이라며. 발음 하나 가지고 열심히 구글링한 니콜라스도 이제 그 단어들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 같은 어학사전 사이트에 골백번씩 들어가는 게 질려서 북마크를 해뒀다.
대ː범-하다, [성격이나 태도가]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너그럽거나 예사롭다.
직관-적,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접하여 바로 파악하는.근데 몰라? 내 작품 중에 너를 찍은 것들이 가장 대범하고 가장 직관적인데. 니콜라스가 우울한 낯으로 사진을 둘러본다. 그냥 이것도 정리해 버릴까. 눈에서 안 보이면 그립지도 않겠지. 아마 한 달 정도는 그때 왜 지웠을까 하고 후회하겠지만, 나중에는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충동이 고개를 들 무렵 문득 메일 알림이 오른쪽 하단에서 반짝인다. 니콜라스가 재빠르게 알림을 클릭하자, 흰 화면 위로 메일 내용이 차차 로딩된다. 그것은 예상보다 긴 메일이었다. 듣자마자 단번에 외워버린 그 메일 주소가 발신인 칸에 박혀 있었다. <[email protected]>. 물론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더라도 니콜라스는 그것이 의주로부터 온 것임을 단번에 알았을 것이다.중국어로 쓰인 의주의 메일은 ‘니콜에게’로 시작하고, ‘주주가’로 끝났으니까. 의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니콜라스를 니콜이라고 부르지 않고, 니콜라스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의주를 주주라고 부르지 않으니까.메일을 빠른 속도로 세 번 읽어 내려간 니콜라스가 의자에 기댄 채 황당한 웃음을 터뜨린다. 겨울 이후로 처음 피가 도는 것 같아서.그토록 바라던 4번 타자의 재림이었다.<끝>

• Home

© 2023 Ways to Say I Love You. All rights reserved.